날이 밝자마자 프라하성으로

서른 살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서

by 전UP주부



아침부터 아들의 식욕이 뻗친다.

이것저것 먹으려는 의욕이 과하니 충분히 잘~ 먹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아이 손에 으깨지고 흩뿌려진 음식물을 거두고 치우며 입속으로 들어가는 건 영~ 적다는 걸 자각한다. 식욕이 아니라 놀이욕이었던 거니? 하나라도 더 먹이려 실랑이하다가 그만둔다. 여행의 반이 지나도록 적당한 에너지적당한 나머지(말하자면 응아)를 만들어낼 정도의 식사량은 충족되고 있으니, 끼니에 대한 투철함을 조금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커피 한 잔을 갖다 놓고 아이의 재롱을 본다. 꿀 같은 시간은 갓 따라 낸 커피가 미지근해질 즈음 끝이 났다.


아침부터 아들의 기운 역시 뻗쳤으므로.

아이는 식당과 연결된 널찍한 통로에서 유모차를 끌며 한바탕 놀았다. 샛노랗게 말끔히 칠해진 내부는 그 자체로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무엇인들 안 예뻐 보였을까. 프라하의 날이 밝았는데! 프라하의 지난밤은 초면이었지만, 프라하의 낮은 구면이었다. 나는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잔뜩 들떠있었다.





오후엔 빈으로 넘어가는 기차를 타야 하므로 한정된 시간을 잘 써야 한다. 곧바로 챙겨 기차역으로 떠날 수 있도록 짐을 미리 싸 두고, 프라하성을 만나러 출발!


유모차도 없겠다, 엘리베이터 대신 나선형 계단으로 산뜻하게 내려가려는데, 유모차 다음으로 아이를 유혹하는 것이 계단 아니던가! 가뜩이나 성큼성큼 내딛는 모양새가 불안한데, 이번엔 묵직한 가방까지 자기가 들고 내려오겠단다. 어미 마음이 조마조마하거나 말거나, 아이는 한 번씩, 꼭 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을 부린다. 한 걸음에 염려를 한 걸음에 안도를 위태롭게 오가는 사이, 어느새 아이는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있다. 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하는 건
너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지.
그런데, 엄마 아빠에겐
안전이 제일 중요했지.



돌이켜보면, 나와 남편에게 깊이 뿌리 박힌 '안전주의'는 어린아이의 수많은 시도와 도전을 마음껏 응원해주지 못하게 한 걸림돌이었다. 다치지 않도록 도우면 될 일도 처음부터 하지 못하게 하는 때가 많았고 무엇을 하더라도 늘 안전을 강조해 제한을 두었다. 덕분에 아이는 깁스를 하거나 몇 바늘 꼬매는 일조차 없이 안전하게 살아왔지만, 왠지 반만 잘 키운 기분이 든다. 안전하게만 살아온 내 삶이 반만 잘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작고 여린 꼬맹이'를 '조금 단단해진 어린이'만큼 키우고 나니, 나를 힘들게 한다고만 생각했던 아이의 고집이 조금 달리 보인다. 안정적인 상태를 벗어나 진일보하기 위한, '이유 있는 생의 의지'로 말이다.





전차였나, 버스였나? 그것은 우리를 포함한 다수의 관광객을 토해냈고, 그 지점부터는 걸어서 가야 하는 오르막길이었다. 건물들에 가려 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어느 틈에 짠ㅡ하고 나타날 성을 마주할 설렘이 지속될 수 있었다. 길을 따라 쭉 늘어선 상점들이 두 팔 벌려 웰컴을 외쳐주는 것 같았다. 아이를 잡은 손이 점점 무겁게 당겨질 즈음, 달달한 간식을 파는 상점에도 들른다. '진저브래드맨' 쿠키를 손에 든 아이의 걸음이 다시금 가볍게 통통 튄다.


예쁜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기념품숍도 식상히 지나며, '목적지'에 얼른 닿기만을 바라게 되었을 때. 서서히 프라하성의 위엄이 드러나면서 허벅지가 다시 힘있게 당겨졌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그냥 '높은 벽'이었을 테니, 막판 스퍼트를 끌어올릴 이유가 되지 못했다. 아이가 이 길에 흥미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이 오르막길을 업고 안고 갈 수는 없는데!!!





점점 절박해지는 엄마 아빠에게 구세주가 등장했다. 바로 거리의 예술가!

프라하성까지 가는 마지막 오르막 구간, 그 중턱에 절묘하게 자리 잡으신 멋쟁이 바이올리니스트 할아버지!

연주를 들려주시다가, 아이의 어깨에 살포시 바이올린을 얹으시고, 바이올린에 닿는 아이의 손을 너그럽게 받아주셨다.



관광지에서의 기억을
특별한 추억으로 만드는 건 아마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날 혼자 프라하성을 향해 걷던 길목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어준 친절한 이를 떠올리며, 이렇게 각별한 마음으로 두 번째 프라하성을 찾았듯.

내 아이에게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 예술가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또 언젠가 세 번째 프라하성을 만나러 갈 것 같다.





혼자 왔던 그때에도, 아이와 함께 온 이번에도, 프라하성 정상에 있는 성당 내부엔 들어가지 못했다. 프라하에 머무는 시간은 매번 왜이렇게 촉박한지. '그때는 당일치기였는데 이번에는 일박으로 늘었으니, 다음에 올 때는 한 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급조한 기대감으로도 아쉬움이 덜어졌다. 어차피 프라하성에 온 목적은 '올라가고 내려오는 여정'에 있었으므로, 남은 절반의 여정을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내리막길은 훨씬 수월했다. 꾀를 부리기 시작한 네 살 꼬맹이를 업고 안으며 내려올 수 있을 정도였다. 내리막길에서 나는 유독 감상에 젖어들었다. 프라하에 처음 당일치기로 다녀갔던 날의 기억 때문이다. 이 길로 오르고, 길을 잃을까봐, 다시 이 길로 내려왔었다. 잠시 서서 쉬었던 곳, 사진 찍었던 조각상, 프라하의 전경, 그 모든 게 변함이 없었다. 그때는 없었던 길동무가 지금은 있다는 것 말고는.






내 나이 서른, 그러니까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남편의 학업으로 영국에서 1년을 지낸 후 귀국을 앞두고 오스트리아 빈에 한 달간 머물렀었다. 그중 하루에 프라하에 다녀오기로 계획하고 버스표까지 예매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일정을 한 이틀 앞두고 다퉜다. 떠나는 날까지 설마설마했는데 이노무 남편이 자기는 안 가겠단다.


그래? 나는 가련다!!!

기세 좋게 나서 놓고 그날 하루 종일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스마트한 기능이라고는 없는 2G폰을 들고 관광지에 대한 정보도 없이 지하철역 이름만으로 가늠하여 내리고 탔으니,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구시가지를 찾아 걷고 프라하성을 오르는 등 반나절 관광으로는 꽤 알찼다. 무슨 초인적인 힘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나 싶다. 보란 듯이 혼자서도 구경 잘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소심하고 겁도 많다. 지금만큼 낯이 두꺼워지기도 전이었다. 때문에 낯선 도시를 혼자 여행한 경험은 상당히 불편했고 조금은 초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 당당히 '나만의 프라하'를 쟁취한 그날은 더없는 가치로 남았다.






이날 나의 길동무는 남편도 아이도 아닌, 서른 살의 나였다. 그녀와 나란히 추억 속을 걸어 내려오며 열 번쯤 깊이 감탄한 것 같다. 내리막길의 끝에서 "당신은 그날 고집 피우느라 안 왔지? 햐~ 두 번째 오니까 너~어무 좋네!" 약도 올려봤지만, 그날 그 시각 남녀혼탕을 관광?했던 남편은 회한이 1도 없어 보였다.





프라하를 떠나기 전 득템한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모습과 지루함이 극에 달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모습이 교차되니 웃음이 난다. 프라하에서 빈까지, 네 시간에 가까운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그저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놀고 먹고 만화영상을 보는 것 외에 무엇보다 아이는 에너지를 쓴 만큼 넉넉히 잘 잤기에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수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후 내내 달리고 달린 기차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에야 우리를 내려 주었다.



총 네 번의 기차여행으로 다섯 개의 도시를 거치는 여정이 절정을 향해 왔다.
드디어,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마지막 도시,
빈에 왔다.



호텔에 짐을 풀어놓은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조금 멀고 복잡한 길을 나서기로 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해 슈테판 대성당이 있는 중심 번화가로 갔다. 가장 먼저 맥도널드에 들어가 제일 먹고 싶은 햄버거 세트를 주문해 맛있게 먹었다.


그 시간에 굳이 거기까지 가서???


우리는 빈에 도착한 그 밤, 무엇이든 핑계를 대고 어떻게든 연인에게 가는 심보로

빈의 지하철을, 대성당이 있는 거리를, 맥도널드 햄버거를, 5년 전의 추억을 만나러 간 것이다.


연인과의 재회는 시간도 피로도 잊을 만큼 그저 감격스러웠다.

이제야말로 시차에 완벽히 적응한 아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잘 따라다닌다.

아들과 이곳에 다시 와, 감격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