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칭이 그리워 빈에 갑니다.

오전 일정을 꽉 채운 그린, 그린, 그린

by 전UP주부



빈을 즐길 마지막 하루가 시작됐다. 온 열정을 불태울 각오로 서둘러 나선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마침 일찍부터 문을 연 가게가 있어 요기를 하기 위해 들렀다. '마침 일찍부터 문을 연 가게'에선 하필 아침부터 피자를 팔고 있었다. 페퍼로니 피자, 네 살 아이의 첫 끼니로는 영 안 내켰지만, 그저 좋아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내 속이 다 든든해졌다. 여태껏 건강히 다녔겠다, 내일은 한국행이겠다, 뭘 더 걱정하리오. 뭐든 먹고, 얼른 가자. 나를 기다리는 그린칭으로.





그린칭(Grinzing)은 빈의 외곽에 위치해 가는 길이 간단치 않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 시간과 품만 들이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먼저 버스를 타고 트램으로 환승할 정류장까지 간다. 트램으로 갈아타고 망중한을 즐기다가 부쩍 한적해진 거리가 생경할 즈음 그린칭 마을에 도착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곳에서 다시 배차 간격만큼 기다렸다가 칼렌베르크 전망대까지 구불구불 올라가는 버스를 탄다. 약간의 멀미와 만차의 갑갑함을 인내하며 종점까지 가면 드디어 일차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린칭은 나와 남편에게, 간단치 않은 길을, 시간과 품을 들여, 기꺼이 나설 정도의 의미였던 것이다.





5년이란 시간은 이곳에서
바람과 함께 흩어져버리고 마는 걸까.
시간에 대한 관념이 흔들렸다.



5년이 지났으니 5년만큼의 변화를 예상했다가 조금 민망해졌고 이내 가슴이 울렸다. '아, 시간에 비례해 발전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은 무의미한 것이로구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이 통째로 잃어버린 듯했던 지난 몇 년이 더 이상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변덕도 변함도 없이 그대로인 대상이 내게 주는 위안과 위로가 컸다.





그린칭의 매력은 이차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내려가는 길'에서 더 빛난다. 전망대에서 대기 중인 버스를 타도 되지만, 도보로 내려갈 수 있는 포도밭길을 선택해야만 그 '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그해에 재배한 포도로 만든 화이트와인을 파는 곳, 혹은 그 와인을 호이리게라고 부르는데, 그것의 이름난 산지인 만큼 언덕을 온통 뒤덮은 포도밭이 경이로운 풍광을 자아낸다. 넋을 놓고 보다 보면 어느 순간 태양의 장난기를 눈치챌 것이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빼꼼히 내밀었다가 아예 숨어버리거나 갑자기 쨍쨍 내비쳤다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변화무쌍한 빛과 그늘의 춤사위 덕분에 초록은 다 같은 초록도, 항상 그 초록도 아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 속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감탄의 연속이다.





그린칭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베토벤이다. 그린칭에서는 베토벤이 살았던 집, 베토벤이 산책한 길, 베토벤의 단골 호이리게 등 그의 이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베토벤 이정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건 포도밭을 벗어나 마을에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땐 그랬지.. 알콩달콩 산책길을 걸으며 할렐루야를 흥얼거리다가 영감이 떠오른 척 장난도 치고 베토벤 흉상 앞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증샷을 남겼었지.. 그 시절 걷던 산책길과 엇비슷해 보이는 숲길을 지나며 추억에 젖었는데, 느닷없이 놀이터가 나타났다. 베토벤이 뛰어놀았을 리 없지만 베토벤이란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던 '베토벤 공원(이라 쓰고 놀이터라 읽는)'이었다.


남편이 미리 알고 계획한 건가? 나와 비슷한 반응으로 멈칫한 것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제에 이어 아들의 놀이터 DNA가 또 작동한 걸까?


아직 갈 길이 멀다구. 여기서 지체하면 안 돼! 휘몰아치는 머릿속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나는 이미 놀이터 안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어떤 보상으로도 타협하지 않을 기세로 뛰어들어간 아들을 뒤쫓은 것이긴 하지만, 실은, 두 눈에 들어온 놀이터의 자태에 홀려 마음속이 한없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숲의 요정들이 놀다 가는 곳일까? 평소엔 낡은 벤치가 몇 개 놓인 볼품없는 공터였다가 사랑스러운 아이가 지나갈 때 짠! 하고 선물처럼 둔갑하는 동화 속 놀이터??





베토벤의 이름이 붙은 관광지 중에서 내 감각을 가장 많이 자극한 건 바로 이곳, 베토벤 공원이었다.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명성의 또 다른 근간이 '아이들을 생각하며 만든 공간'에 촘촘히 깃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상상하고 도전하고 꿈을 꾸며 하루를 건강히 채우겠지. 놀이터에 담은 자연놀이터에 담긴 진심을 한껏 느끼고 돌아서니 여운이 짙었다. 이름도 기똥차게 잘 지어서 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동심 속에서 한바탕 놀다 보니 해가 벌써 비스듬히 걸려 있다. 다음 스폿까지의 이동시간과 밥시간을 더하면 한 뼘 더 기울겠다. 마음은 바삐 가는데 몸이 잔뜩 무거워졌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무료함에 피로감이 훅ㅡ얹힌다. 하지만 활력을 되찾는 건 시간문제, 다음 설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