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짐들은 가방 속으로 음식은 뱃속으로 착착 정리정돈을 해 나간다. 서두를 필요 없는 아침이 오랜만이다. 빈에 머무는 동안 바삐 돌아다닌 여파 때문인지,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게 도리어 안심이 된다.
어쩌면 이런 기분은 체념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머물고 싶어도 돌아가야 했으므로, 더 이상의 미련은 아쉬움만 키울 것이므로.
'괜찮아.' 서둘러 입막음하듯 북받치려는 마음을 막아둔다.
빈에서 출발한 뒤 터키를 한 번 경유해 한국으로 가는 긴 비행이 남았다. 우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빈에서 터키로 넘어오는 짧은 이동은 '비행기 놀이'를 즐기기에 적당했다. 터키 공항에서 대기하는 서너 시간도 카트를 끌고 여기저기 활보하며 신나게 보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여정이었기 때문에 아쉬움 없이 만끽하고자 했던 것도 있지만, 남은 비행 여정에서는 나만의 시간을 길~~~게 누리고 싶은 속셈이 더 컸다.
나의 빅픽쳐대로 아이는 꽤 긴 시간을 수면 상태로 날아왔다. 그래서 내가 나만의 시간을 원 없이 누렸느냐........하면, 그렇지 못했다. 마음은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시며 우아하게 마침표를 찍고 싶었으나, 아이만큼 에너지를 쏙 뺐으니 아이처럼 곯아떨어질 수밖에. 긴 비행의 끝, 침 자욱만이 허무하게 남았다.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긴 시간, 대낮인 듯 또랑또랑한 정신이 마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첫날 같다. 비행기에서의 꿀잠으로 오늘 밤 잠은 다 잤다고 봐야 했다. 다음날 바로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고이 두고, 자전거 타고 싶다는 아이와 둘이 집 앞 놀이터로 나갔다. 능력치에 앞서 장만한 자전거라 여전히 굴리지는 못하고 그저 올라타는 수준이지만, 발에 힘을 주는 모양새를 보니 열흘 사이 좀 자란 듯 보이기도 하다.
아이는 특별한 여행지에서 놀던 마음가짐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대수롭잖은 일상의 한복판에서 놀이를 이어가고 있다.
어제는 빈의 놀이터에서 놀다가 오늘은 우리집 놀이터에서 노는데, 장소 빼고는 모든 게 같아 보였다. 일상 같은 여행을 하고 왔더니 여행 같은 일상도 그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묘한 감정에 빠져있는 나에게,아이는 전혀 몰랐다는 듯, '여행과 일상이 다른 거예요 엄마?' 되묻는 것 같다. 그러게, 오늘따라 많이 비슷해 보이네. 하긴, 꼭 구분할 필요는 없지. 같은 마음가짐과 같은 감사함으로 지낸다면 말이야.
오늘은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허문 첫날이다.
에.필.로.그.
그래서 나는 이후로 쭈욱 일상을 여행처럼 살았느냐........하면, 이 또한 그렇지 못했다. 여행과 일상의 합일은 길이길이 남을 포토북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딱이었을 뿐. 일상은 있는 재료 섞어 지지고 볶는 집밥에 가까운 게 제맛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특별식이 그리울 때 떠나는 게 여행이라는 건 부인하지 못하겠다.
다만 여행의 경험이 쌓일수록, 일상에서 여행으로 건너갈 때 그리고 여행에서 일상으로 건너올 때 둘 사이 문턱이 점점 낮아지고 간극이 점점 좁아지는 걸 느낀다. 대단한 결심과 명철한 계획 후라야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여행 같은 일상'은 못되더라도 '여행을 기대하는 일상' 만으로도 활력이 생긴다.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일상은 그렇지 않은 일상보다 한결 홀가분하다.
또한 여행의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 부부가 여행하는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각자의 영역에 선을 그어 각개전투로 최선을 다하기보다 스케줄 케어 영역과 아이케어 영역 둘 다에 주도권을 공유하고 부담을 나누면서부터 매너 있는 여행 메이트로서의 합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여행이 만들어 준 합이 결혼 15년 차의 일상 속에도 그대로 녹여지는 것을 보면, 여행의 진화는 삶의 진화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역시나 여행과 일상의 긴밀한 연결점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냥 집밥이든 특별식 같은 집밥이든, 지지고 볶으며 일상을 살다 보면 진짜 여행을 함께 떠날 날이 또 오겠지. 그런 기대와 희망이 오늘을 살게 한다. 코로나 시국을 기꺼이 견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