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재발견
요즘 아들과 즐겨 하는 놀이가 있다. 폼롤러(내가 이걸 운동도구로 사용한 적이 있...던가?)로 영역을 표시해두고, 모자를 공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거나 던져서 맞추거나 하는 간단한 놀이다. 대략적인 방법은 그렇지만 세세한 룰은 아들이 그때그때 정하는 고로, 진행은 늘 변화무쌍하다. 내가 서브권을 쥐고 먼저 모자를 넘길 때 중간 네트(역할을 하는 폼롤러)에 바짝 다가서서 몸으로 모자를 막아내며 동시에 넘기는 아들의 블로킹 기술이 일품인데, 아들이 이것을 배구놀이, 라고 작명한 건 나름 그 자부심에 기인한 것이다.
세세한 룰은 지키자고 만드는 것이지만, 안 지켜도 크게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안 지키면서 엉뚱한 방면으로 플레이할수록 웃음이 푹푹 터져 나오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통하는 지점이다. 바닥에 이미 떨어진 걸 집어서 던지는 건 금기지만, 얍삽하면서도 티키타카 플레이가 이어져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둘 다 허용하는 이유다. 말이 좋아 블로킹이지 몸을 던져서 내 쪽으로 아예 넘어오기 일쑤인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며 넘어오는 모습에 저도 나도 깔깔 웃는다. 옜다, 기분 좋게 한 점 주지만, 사실 이렇게 웃기고 재밌는 일에 승부 따위는 이미 out of 안중,이다.
공 대신 가지고 놀게 된 그것으로 말하자면, 아이가 세 살 즈음 친정식구들과 함께 갔던 제주도 여행에서, 할머니 취향으로 손주에게 선물해 주신(엄마는 여행을 추억할 기념품 사는 걸 좋아하신다), 천연 염색된 중절모 스타일의 모자다. 딱딱한 챙이 없어 소프트하면서도 형태가 잡혀있어 날리는 방향대로 곧잘 날아가 준다. 공에 비해, 바닥에 떨어져도 소음이 없고, 주변 집기들에 부딪쳐도 데미지가 없으며, 간혹 정면으로 얼굴을 강타 당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아서 여러모로 제격이다. 무엇보다도, 그 오랜 세월 모자 구실을 못해 무용하게 여겨지던 것을 이렇게라도 잘 써먹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로 뿌듯하다. 덕분에 놀이 때마다 제주의 기억이 소환되기도(기념품 소비를 지향하는 엄마의 빅픽쳐가 이 정도일 줄이야).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잘 ‘노는’ 엄마가 아니다. 외동이라 놀이상대가 있어야 하기에, 그것을 내 역할이자 의무로 여기고, 가끔은 기꺼이, 때로는 못 이겨서 ‘놀아 주는’ 식이다. 언제 한번은 아들의 일기장에서 ‘시간 모르게 엄마랑 놀고 싶다’라는 문구를 읽고 미안함을 느꼈다. 이후로 시간을 재지 말고 놀아줘야지 결심은 하는데, 공술(공포의 술래잡기, 내가 좀비가 되어야 한다)이나 간지럼 태우기(누워서 하는 놀이라 좋긴 한데, 덩치 커진 아들의 저항은 기운을 쏙 뺀다) 등 아들의 요청에 맞춰야 하는 놀이는 어느 정도 만족시키고 속전속결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아이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 우리만의 배구놀이를 발견한 건 참 다행스럽다. 이때만큼은 놀아 주는 게 아닌, 놀고 있는 나를 만난다. 언니들과 동생과 이름도 출처도 없는 놀이를 만들어 까르륵 대며 놀았던 어린 나를 만난다. 나의 유년의 한 순간처럼, 천진한 웃음을 뿜어내는 아들을 보고 있자면, 오늘 하루를 내가 참 잘 살아낸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