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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Feb 26. 2020

가을을 닮은 서점

속초 문우당서림

속초에는 동네책방이라 부르기 약간은 머쓱할 수 있는, '전국구' 서점이 있다. 동아서점, 문우당서림. 두 곳 다 역사가 깊지만 역사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더해가고 있을 이 두 곳의 색채. 나에게 동아서점은 여름과 바다를, 문우당서림은 가을과 산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 글은 문우당서림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이야기한다.


할아버지의 영한사전


1층에서 한 할아버지가 영한사전을 찾고 있었다. 대부분의 중소형 서점은 검색대가 없고 큐레이션도 독특해서, 찾는 책은 직원에게 문의하는 게 빠르다. 할아버지의 '요청'을 받은 1층 직원이 2층에 연락했다.


"영한사전 두 종류 정도 가져다주실래요?"


종이사전을 찾는 것으로 미뤄 아마도 영어를 공부해보려는 건 할아버지 본인이었을 거다. 할아버지가 늦은 배움을 시작한 이유를, 그 시작의 첫 마음을 난 알지 못한다. 설렘이었을까, 막막함이었을까, 어쩌면 두려움이었을까.


다만 생각했다. 아주 적어도, 할아버지의 마음 안에서 설렘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2층으로의 계단을 힘들게 오르다가, 혼자서 책을 찾으려다 생겼을지 모를 두려움 말이다.


공간의 문턱은 낮았고, 머무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는 가을볕처럼 흩어졌다. 9만여 권의 책이 있지만 무엇도 위압하지 않았으며, 두 개 층으로 나뉘었지만 누구도 소외받지 않았던 곳, 문우당서림.


적당한 소란을 사랑하자는 말


2층의 일부 독립출판물들은 개별포장이 돼있었다. 포장을 뜯어볼 수는 없지만 대신 구매 전 책을 펼쳐 볼 수 있게 샘플북, 일종의 '헌책'도 같이 놓여있었다. 거기엔 미리 읽어본 직원들이 코멘트 메모지를 붙여뒀다. 편지 같았다. 전문가의 그럴 듯한 추천사도, 출판사의 화려한 소개글도 아닌, 편지.


나한테 온 편지들을 대충 손에 잡히는 것만 읽는 재주는 없어서 다리가 아프도록 하나씩, 하나씩 다 읽어봤다. 읽다보니, 새책 말고 그 편지(코멘트)가 붙은 헌책에 또 정이 든다. 손떼가 좀 묻은 책을 데려가고 싶어졌다. 헌책은 10% 할인도 해준다.


사장님이 내가 고른 책을 종이가방에 담으며 서점 소개가 적힌 종이를 주시기에, 이미 있다고 말씀 드렸다. 문우당서림이 '서울카페쇼'에서 '커피와 함께 읽는 책'을 테마로 부스를 마련했을 때 받은 것이었다. 그때 문우당서림을 알게 됐고 일부러 이렇게 먼길 다시 왔다는 사실을, 사장님은 그렇게 반가워 해주셨다.


"가격 할인은 그대로 해줄 테니 새 책 가져가는 건 어때요? 고맙고 좋아서 그래요."


계산대 주변이 우리의 대화로 채워지고, 계산대 아래에 붙은 구절이 눈과 마음을 두드렸다. '적당한 소란: 우리는 침묵보다는 당신과 함께하는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줄 대화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서점이 사랑하고 싶은 게 다름 아닌 대화라는 , 낯설지만 반가웠다. 고맙고 좋은 건 역시나 나였다.


책과 사람은 함께 한다는 뜻의 문우당. 이곳에서 책은 사람이 되었고 사람은 책이 되었다. 문우당서림은 이름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가을을 닮은 곳



문우당서림이란 공간은 원목의 디자인이 중심이 된다. 서가는 물론, 시선이 주로 머무는 벽면이 갈색을 띤다. 그때 이 공간에 색을 더해주는 건 수많은 책들이자, 이 기록들이다. '당신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방문객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문우당서림이 책에서 길어올린 문장의 기록들.


한 해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꿋꿋이 버텨낸 가을 나무들은 갈색의 기둥으로 안정감을 전하고, 이런 저런 색의 파리로 보는 즐거움을 남긴다. 문우당서림은 가을을, 가을의 산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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