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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Feb 26. 2020

작가의 조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나요?

2016년 종영한 tvN 드라마 <시그널> 4회, 경기남부 살인사건의 결말이 그려진 회차. 경기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을 쫓는 형사 이재한(조진웅)은 자신이 사랑했던 동사무소 여직원 김원경(이시아)의 죽음을 발견한다.

출처 : tvN 드라마 <시그널 > 4회


순경 업무에 있어서는 국회의원 차량에도 주차 위반 딱지를 붙일 만큼 소신 있는 멋진 형사 이재한. 하지만 호감이 있었던 원경 앞에서는 말까지 더듬을 만큼 부끄럼을 타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마음을 담아 건넸던 선물이라고는 호신용 전기충격기 하나뿐. 재한의 마음을 알고 있던 원경은 목걸이나 반지를 선물 받은 것처럼 전기충격기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애틋한 짝사랑은 결국 서로의 마음이 닿지 못한 채, 연쇄 살인 사건을 피해 가지 못했다. 원경이 피해자로 남았던 그 사건 후로 사직서를 준비하던 재한에게 원경의 어머님이 찾아온다. 그리고 어머님이 재한에게 건넨 영화 티켓 두 장. 원경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재한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며 건네려 했다던 선물. 재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아쉬움, 마지막으로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함께 들려오는 장범준의 OST <회상>의 노랫말은 정말 정말 슬펐다...

그렇게 원경이 남긴 티켓 두 장을 들고 홀로 영화관을 찾은 재한은 가깝게 맞닿은 한 자리를 비워두고 앉는다. 영화는 시작되고 주변을 둘러싼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누가 봐도 연인들이 함께 보는 코미디 영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재한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드라마 <시그널>의 명장면이다(조진웅 영화관 오열씬).



종영한 지 3년도 더 된 드라마의 명장면을 뜬금없이 브런치로 옮긴 이유가 있다.


최근 일요일 아침에 조조로 영화관을 홀로 찾았다. 코미디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모두가 빵빵 터지며 웃는 장면에서 누군가 구석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영화관 내에 음향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지는 않았으나, 내 자리에서는 누가 봐도 서럽게 우는 옆모습이 보였다. 조금씩 훌쩍 거리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그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 그 남자는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자리를 떴음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사연이었을까. 모두가 웃는데 왜 그는 너무나도 서럽게 펑펑 울고 있었을까. 영화는 정말 재밌게 보고 나왔지만 울음을 쏟아냈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마다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치 <시그널>을 집필한 김은희 작가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로 인해, 가족과의 사별, 소중한 무언가를 떠나보낸 이가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서 슬픔에 허우적댄다면? 인간의 감정과 이러한 사연을 드라마의 이야기로 온전히 옮겨낸 작가의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온 마음 다해 공감하고 누군가에게 공유하고픈 이야기란 바로 이러한 감정의 디테일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면서 자신만의 시선과 감정으로 특별하게 바라보는 것. 천부적인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거기에 심금을 울리는 장범준의 노래가 얹혔으니, 명장면이 아니려야 아닐 수가 없다.


가끔 주변을 잘 살펴보기를 바란다.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저 사람은 왜 울고 있을까? 모두가 웃고 떠드는 카페에서 저 사람은 왜 남몰래 울음을 삼키고 있을까? 공원 한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저리도 힘 없이 고개를 떨구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걸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어쩌면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도 보통의 직업일지도 모른다. 다만, 조금 더 사소한 것들에 눈이 가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섬세한 사람일 뿐. 작가다운 필력은 그 다음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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