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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Feb 29. 2020

나만 살고 있는 섬에 썰물이 없다면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해답

얼마 전, 회사에서 3일 밤낮으로 한 가지 주제에만 매달렸던 적이 있다. 오랜만에 대학생 때 공모전을 앞두고 막판 스퍼트를 올리며 밤샘 작업을 했던 향수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름도, 활용법도, 성격도 각기 다른 5개의 공간을 하나로 묶어 브랜딩을 해야 하는 Task였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같은 주제로 리서치를 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토론을 했다. 그리고 다시 흩어져 리서치를 보강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모여 다시 토론하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을 동일하게 3일 밤낮으로 돌렸다. 먹고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고, 아니 밥도 함께 먹었으니 눈 뜨고 있던 모든 시간에 같은 고민만 한 셈이다.

나는 솔직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조화롭게 섞여 적당히 촌스럽고, 적당히 세련된 공간으로 매듭짓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막연했던 논리에는 근거가 없었다. 지금 반찬이 내 취향이 아니니 그저 맛있는 것으로 달라며 떼쓰는 철부지 아이의 어리광과 다르지 않았다. 최근의 공간 트렌드는 어떠한지, 2030 세대는 어떤 공간을 선호하는지, 이 곳을 어떠한 경험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한 기승전결이 담겨있는 페이퍼가 필요했다.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리서치를 이리저리 조합해봐도 유의미한 논리가 서질 않았다. 체력은 점점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고 토론은 매일 늦어진 시간이 야속하게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헤매고 있는 이유만이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음원의 표절 시비를 검사할 때 두 곡의 다른 점을 찾아내기 위해 트랙을 돌려보듯이.


사실, 우리는 해답을 위한 모든 근거를 쥐고 있었다. 이보다 더 자세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자료를 뒤져 찾아냈고 몇 시간이고 토론했다. 결론에 근접했다가 내려오기를 여러 번... 이 모든 시간과 과정에 대한 보상 심리였을까.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보고서 마지막에 잘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 누가 봐도 그럴듯한, 그럴싸한, 있어 보이는 결론만을 우리는 원하고 있었던 것. 나는 72시간을 오로지 흠뻑 빠져 있다가 그것으로부터 잠시 벗어나서야 깨달았다.


우리들의 공간은 소비자와 문화예술을 이어주는 곳이어야 한다


3일 밤낮을 지지고 볶으며 내린 답은 한 문장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결론이었지만 우리가 그 모든 시간들을 견뎌냈기에 가능한 결론이었다. 과거 채널A의 프로그램 <굿피플 : 신입사원 탄생기>에 등장했던 한 출연자의 일기 문구가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오버랩되는 것만 같았다.

<이미지 출처 : 채널A 예능 프로그램, 굿피플>
지금까지 내 앞에 도전들. 크고 작은 어려움에 맞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내게는 그렇게 해서 찾았던 그때그때의 해결책, 해답, 결과보다는 무던히 포기하지 않고 견디고 견뎠던 그 시간들이 변함없는 단 하나의 해답이었던 것이다. <굿피플 출연자, 인턴 임현서의 일기 中>


답이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토론을 이어갔다. 답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조적인 마음도 종종 들었지만 버텨냈다. 무던히도 견디고 견뎠던 시간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해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묘한 감정이 휘몰아쳤던 마지막 날 늦은 밤이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앞에 마주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나만 살고 있는 섬에 썰물이 없다면, 떠내려오는 모든 것들은 결국 내 짐이다. 


답을 찾고자 하는 문제 위에 우리만 있다면 답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 썰물과 짐에 대한 생각은 이미 '검정치마'라는 뮤지션이 <섬>이라는 곡에서 질척거리는 감성으로 아주 잘 표현해냈다. 조만간 글 작업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한 번 감상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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