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셋을 키우며 가장 수월했던 아이는 둘째였다.
이 아이는 나를 닮아 서글서글하고, 배려심도 깊고, 양보도 잘하는 아이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음이 넓은 아이로 통했고,
누군가 다투기라도 하면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재자처럼 조심스레 사이를 다독이곤 했다.
그런 아이에게, 중학교는 너무 잔인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아이는 비난과 조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문제의 뿌리는 늘 그렇듯 질투심이었다.
질투가 많은 아이들이 둘째와 부딪혔고,
그 감정은 방향을 잃고 아이를 향해 독처럼 번져 나갔다.
학교 가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던 아이는
이제 매일을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루의 반을 보내는 그곳이,
아이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입학 초반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하지만 6월쯤 작은 사건 아닌 사건이 있었고,
그 일 이후 아이는 처음으로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려 했다.
유연하게 대처하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믿었다.
다시 좋은 친구들이 되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도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야금야금 아이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병원을 찾아가 보았고,
학교와 이야기도 나누며 해결을 기대했다.
하지만 학교의 대응은 순간적이었다.
이 학교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아이 하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학교에선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면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당하는 아이에게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성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학교 성적이 낮아 자신감이 떨어져 아이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을 수도 있다는데
난 성적 보다 내 아이가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그게 먼저인 부모다.
그 아이들이 내 아이들보다 나은 게 성적?
웃음이 난다.
이제 고작 중1이고 과연 이런 아이들이 건강한 어른이
될까?
학폭은 멍을 남기는 폭력만이 아니다.
따돌림, 조롱, ‘꼽 준다’는 말로 표현되는 비수 같은 말들.
이것은 분명한 정신적 폭력이다.
그리고 내 아이는 매일 그 비수에 베이고 있다.
이 아이 저 아이 돌아가며 내 아이 하나를 짓밟고
싶어 한다.
내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타학교 친구들과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그 친구들은 내 아이의 힘듦을 잘 이해해 주고
다독여 준다.
그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우리 때도 따돌림은 있었다.
나도 중학교 시절 친구 대신 나서서 싸워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겐 그런 친구가 없다.
오히려 방관하거나, 슬며시 가담하며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아이들뿐이다.
타학교 친구들이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하루의 반을 이 학교에 있는 이상은 아이는 힘들 수밖에..
그래서 나는 결국 칼을 빼들었다.
무얼 썰기 위해 꺼낸 칼이 아니다.
이 비열한 싹을 확실하게 잘라내기 위해 꺼냈다.
반드시 없애야 한다.
아이의 마음을 갉아먹는 주동자들.
침묵으로 일관하는 학교.
비겁하게 눈을 감는 방관자들.
그 모든 비열한 싹을 나는 이번에야말로 잘라낼 것이다.
아이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나는 더 단단해지기로 했다.
누구도, 어떤 것도
내 아이의 마음을 다시는 갉아먹게 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