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머금은 열기 가득한.
어쩌면 J는 나에게 가장 많은 꽃을 선물해 준 사람이다. 아니 확실하다.
예고 없이 이루어지는 급작스러운 어떤 날의 만남에서 꽃다발을 준비할 줄 아는 낭만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최근 대체로 우울하고 울적해하는 쪽은 나인데 예민한 촉을 가진 J는 그런 기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나의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면서 꽃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건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내 기억에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던 날에도 나에게 꽃을 사준 건 J였다. 그때 찍은 사진 속 내 얼굴이 유난히 밝았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의 최소 한두 시간 전에 미리 내가 좋아하는 색상을 지정하거나 제철에 맞는 꽃을 골라서 예쁘게 만들어달라 주문해두었을 J의 모습을 떠올리면 손에 들고 있는 꽃보다 그녀가 더 반짝거린다. 반가운 얼굴로 꽃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는 J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다.
사실 비싸고 희귀한 꽃이 아니라도 아마 그녀가 길에서 클로버 꽃을 한주먹 꺾어온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기뻐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며 언젠가부터 나는 자연과 계절에 민감해졌다. 예전엔 무심코 지나쳤을 길가의 들풀마저도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지경이다. 봄이 오는 기미가 보일 때부터 어쩐지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만다.
그만큼 나의 바이오리듬은 계절과 날씨에 굉장히 민감해졌다. 도시에서 나이 듦이란 것은 점점 자연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 순리인 걸까? 도시에서 나이가 든다는 건 도시로 향하고 싶은 마음 곡선이 반비례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렇게 도시의 다 큰 어른들은 형형색색 등산복을 차려 입고서 철마다 산으로 들로 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런 나에게 6월은 여름의 시작이다. 그리고 오늘은 하지(夏至)이다. 해가 가장 긴 날. 그리고 일 년의 절반이 지나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일 년이라는 시간에 시작과 끝 지점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6월은(유월... 발음마저도 아름답다) 가장 걸을만하고 괴롭지 않게 여름을 즐길 수 있는 달이기도 하다. 정오 즈음에는 타들어갈 것 같이 뜨거운 날이지만 저녁이면 아직은 선선한 기운이 남아있는 자애로운 달이기도 하고, 여름 고유의 습기를 살짝 머금은 공기 내음이 밤 산책을 한결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치열하게 산책해야만 하는 때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본격적인 열대야가 시작되기 전의 초여름밤은 풋내나는 첫사랑 같아서 연애 중이 아니더라도 그 시기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센티멘털한 몇 가지 유치한 단어를 내뱉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June, 세상에. 영어이름마저도 귀엽지 아니한가 말이다. 스무 살의 소년같은 달.
캐주얼하며 무겁지 않고 그저 상쾌한 여름의 캐릭터가 오롯이 담긴 달이다. 유월은.
그렇게 6월이 좋은 이유 중의 또 한 가지는 6월 말 즈음이 되면 내가 좋아하는 여름 꽃이 길가에 가득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능소화말이다. 담벼락마다 늘어져 있는 여름의 꽃. 찬란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면 그 과감함이 빛나 더욱 예쁜 꽃. 존재감을 치열하게 내뿜는 여름의 식물이다.
진한 초록잎과 밝은 주홍 꽃이 대비되어 정말 예쁘고 붉거나 분홍이 아니라서 한결 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점점 뜨거워지는 낮의 타오르는 햇살처럼 붉은 주홍빛이 영롱한 능소화는 촘촘하게 덩굴진 초록잎을 배경으로 한 그 색 대비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그 여름의 색을 감상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진짜 여름이 온다는 신호다. 진짜 여름이라는 건 단단한 껍질안에 뜨거운 온기를 달콤하게 품은 수박을 먹는다는 것이고 주홍빛의 능소화가 담벼락에 흘러내리는 골목을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6월이 지나고 뜨겁고 치열하게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면 수확을 기다리는 가을의 열매처럼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