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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자, 과거에서 눈 뜨다

by 신영웅

∀1909년 10월 10일

어느 인적 드문 숲


유영 “아오... 머리야. 간밤에 또 미친 듯이 들이부은 건가?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유영의 눈꺼풀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그녀는 어슴푸레 잠자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다.


유영 “누가 반만년이 넘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 같은 친일파 서하영의 후손 아니랄까 봐 어떻게 술만 마시면 멍멍 거린대니?! 그나저나 서하영씨! 당신도 술만 마시면 이랬나요? 아니지~ 맨정신으로도 멍멍 거리고 다녔겠지!”


괜히 너스레를 떨어본다. 그리고는 이내 머쓱했는지 코를 찡긋거린다. 그녀의 버릇이다.


유영 “시리야, 몇 시야 지금?”


스마트워치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배터리가 없는 모양이다.


유영은 기억을 더듬는 대신 주변을 살피기로 한다. 뭐라도 건져볼 심산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풀과 나무뿐이다.


유영 “대, 대체 여긴 어디...야? 앗~ 머리가... 또 딱따구리가 머릿속에 찾아오셨군.”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두 손으로 눈을 비비는 유영. 사람은커녕 그 흔한 오솔길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자신이 인적이 드문 숲속에 쓰러져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유영 “뭐야? 아파트 잔디밭이 아니잖아?!”


평소 술만 마시면 끝까지 달리는 유영이기에 길바닥에서 눈을 뜨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녀는 평소와 같이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역시나 딱따구리가 쪼는 듯한 두통뿐이다.

유영 “이러다간 연애 한번 못 해보고 객사하겠네, 뒤지겄어 아주 그냥. 진짜 내년부터는 술을 끊어야지. 암 끊어야 하구 말고. 내가 꼭 내년부터는...”


이는 물론 빈말이다. 그녀가 술 마신 다음 날 자주 하는 단골 멘트다. 그러나 동시에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는 말이기도 하다.


유영 “근데 담배는 끊어도 술은 절대 못 끊... 아니지~ 술이 더 끊기 쉬운...가? 하긴 담배 없이 똥을 어떻게 싸?! 안 그래도 요즘 변비 때문에 힘든데.”


처음에는 산길에서 눈을 떴기에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유영 “가만 보자~ 어제 누구랑 마셨더라? 할부지랑 삼촌들이랑 개관식에 갔... 가만?! 행사 이후로... 음... 기억이... 음... 어라? 뭔가 악몽을 꿨던 것 같은데...”


유영의 몸은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는 여전히 아프고, 팔다리는 갓 태어난 송아지마냥 후들거린다. 속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이 메스껍다.


유영 “아, 목말라. 어디 물... 없나? 이 근처에 편의점은 있겠지? 일출808 하나 때리면 딱인데!”


일단 유영은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유영 “폭탄을 몇 잔이나 마셨길래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지? 이래서 막사는 조심해야 돼. 시작할 때는 맛있지만 늘 끝이 처참하다니까. 그나저나 여기 7G는 잡히겠지? 구글맵을 켜야 집에 갈 텐데.”


유영은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계속 두드린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유영 “밧데리가 없나? 건 그렇고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삼촌들은 나 그냥 버리고 간 거야? 이렇게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나를 버리고? 아오~ 진짜 너무하네 다들. 집에 가면 가만 안 둬.”


조금씩 산 아래 마을 풍경이 유영의 눈에 들어온다.


유영 “저 많은 한옥들은 다 뭐지? 여기 용인이야? 어? 나 분명 어제 대마도 행사장에서... 아앗!”


딱따구리 열 마리가 동시에 유영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유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어쩌면 일부러 모른 체한 것일 지도 모른다. 본능적 불안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랐기 때문에.


유영 “민속촌에도 편의점은 있겠지? 용인에서 집까지 가려면 한참일 텐데 얼른 물이나 마시고 돌아가자. 이번 주는 밀린 잔업도 많고, 게다가 할부지는 이번 발파작업 발주기획서도 나한테 시킬 게 뻔하니까 미리 쳐낼 건 쳐내야지.”

그러나 마을에 도착한 유영을 맞이한 것은 그녀가 기대했던 편의점과 택시 정류장이 아니었다. 대신 정신없이 지나가는 인력거와 요란한 소리의 전차,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낡은 가옥들, 그리고 한복 차림으로 탁주와 국밥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유영 “세, 세트장인가...?”


유영은 조금 전 자신이 느낀 그 막연한 불안이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다.


유영 “에이~ 설마...”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며 이를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이 모든 것에 눈을 뗄 수 없다.

장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거리가 북적인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유영은 누군가와 부딪히며 넘어지고 만다.


유영 “아앗!”

유영과 부딪힌 사내는 사과 한 마디 없이 그냥 유영을 지나쳐 버린다.


유영 “이건 또 뭐야? 아오~ 오늘 되는 일이 없네.”


불쾌한 마음에 유영은 자신을 넘어지게 한 사내를 불러 세운다.


유영 “여봐요! 거기 아저씨,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죠?”


그러나 그 사내는 유영의 말을 무시한 채 제 갈 길을 간다. 그런 그를 그냥 보낼 리 없는 유영이다. 곧바로 뒤따라가 팔을 낚아채며 돌려 세운다.


유영 “이봐요...!”


금방이라도 싸울 듯이 쏘아붙이던 방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한순간에 얼어붙고 만다. 그리고 유영을 무시하던 그 사내도 유영의 얼굴을 본 순간 놀란 것도 잠시, 갑자기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서서히 유영에게 다가가는 사내. 그 기세에 눌려 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다. 그러다 얼마 못가 바로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유영 ‘이, 이 사람은...?’


그 사내는 정복을 입고 있다. 긴 코트 속에 커다란 일장기가 박힌 걸로 보아 자위대 소속의 군인일 것이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는 어렴풋이 이름표가 보인다. TERA... 코트에 가려서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유영 ‘설마... 꿈이 아니었던 거야?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그러나 선뜻 도와주는 이는 없다.


행인 “저기 무슨 일이 났나벼? 가서 도와줘야 되는 거 아녀?”


행인의 아내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어여 갑시다. 저 남자 옷에 달린 일장기 안 보이슈? 이런 데 엮어봤자 좋은 꼴 못 봐유.”


정체불명의 사내는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을 치는 유영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다가간다. 그는 희미하지만 옅은 미소를 띤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미소는 유영을 더 극한의 공포로 밀어 넣는다.

정체불명의 사내 “여기 있었군. 쓰시마에서 하던 건 마저 해야지...?”


표정만큼이나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사내는 핏자국이 선명한 군용 나이프를 꺼낸다. 굳어있지 않은 걸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행인 “진짜 뭔 일이 나도 크게 나겠는디? 근디 저 군인은 일본말로 뭐라는겨?”


행인의 아내 “지금 나한테 물어본겨? 당신 마누라가 일본어를 할 줄 알면 퍽이나 당신이랑 요로코롬 살고 있겠다, 살고 있겠어~ 쓸데없는 참견일랑 그만 하고 얼른 이리 오슈. 시방 당신 새끼들 배고프다고 난리여. 길 가는 여편네 말고 당신 여편네랑 새끼들부터 챙기슈. 어여 와유. 괜히 근처에 있다가 봉변 당허지 말고.”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터에 시퍼런 날붙이를 든 사내의 등장은 유영뿐만 아니라 장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쉽사리 유영을 구하러 뛰어들지 않는다. 다들 구경만 하거나 자리를 피하기 바쁘다.

유영 “다, 당신은...? 당신이 왜 여...기에?”




장터를 지나던 인력거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멈춰선다.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성이 인력거에서 내린다. 그녀의 이름은 서규하.

규하 “이서방, 잠시 기다려줘요. 그리고 아재 좀 불러주세요.”

규하의 인력거를 뒤따라오던 중년의 사내가 재빨리 규하의 앞을 지켜 선다. 양복 위에 긴 코트, 그리고 중절모까지 갖춰 입은 사내의 가슴팍에는 권총이 얼핏 보인다. 한눈에 봐도 규하의 경호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신태섭.


태섭 “마님,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선한 눈매와 달리 양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야수 같은 몸은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


규하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괴롭히는 것 같은데요? 아재, 아무래도 우리가 좀 나서야겠죠?”

태섭 “아닙니다. 마님은 여기 계십쇼. 제가 알아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괜히 또 나오시지 마시고요. 제가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괜히 나서셨다가 지난 번처럼-”

몇 번이나 당부하는 태섭. 그러나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다.

현장에 도착한 태섭은 사내에게서 살기를 감지한다. 군복 입은 사내의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냥감을 포획한 야수의 눈빛 그 자체였다.


태섭 ‘빨간 머리? 이 여인은 조선인이 아닌가? 얼굴은 조선인인데 의복이 낯설군. 이 일본군의 복장도 처음 보는 것이고. 이들은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태섭은 코트를 젖혀 권총을 꺼내들고는 바로 군복 입은 사내를 겨눈다.


태섭 “무슨 일인지는 모르오만 당장 그 칼을 거두고 물러나시오. 보아하니 일본군인 것 같은데 저기 뒤에 계신 분이 뉘신지 알면 이렇게 경거망동 못할 것이오.”


정체불명의 사내는 태섭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유영에게로 시선을 되돌린다. 마치 ‘관심 없으니까 꺼져’라고 말하는 것 같다.


태섭 “제가 그렇게 참을성이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만-”


태섭의 등장으로 인해 장터의 공기는 이전보다 더 팽팽해진다.


태섭 “처자, 조선인이요? 조선말 할 줄 아시오?”


겁먹은 유영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건다. 그러나 동시에 빨간 머리에 여기저기 주머니가 달린 낯선 옷을 입고 있는 유영을 이상하게 여긴다. 카고팬츠를 태어나서 처음 본 태섭이다.


태섭 ‘괴이한 행색이로군. 느낌이 좋지 않아.’

마치 이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하늘에서 본다면 마치 꼭지각이 예각인 이등변삼각형처럼 보일 것이다.

정체불명의 사내는 난데없이 등장한 불청객이 달갑지 않다. 그렇지만 살의를 거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되려 유영과 태섭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이등변삼각형이 정삼각형으로 변하고 있다.


탕-!


태섭 “멈추시오! 이번에는 경고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오.”


태섭은 군복 입은 사내가 서 있는 바닥 언저리로 위협사격을 한다. 그러나 이 정체불명의 사내는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쁜 미소를 띠며 더 가까이 다가온다. 사내는 들고 있던 군용 나이프를 거꾸로 집어 든다. 날이 바닥으로 향하게 말이다. 장터의 공기는 순간 얼어붙고, 태섭이 차마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사내는 태섭의 품으로 달려든다. 나이프가 태섭의 목덜미를 향하는 그 찰나의 순간...! 난데없는 마차 한 대가 그들 사이로 뛰어든다.

(1화 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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