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다롄시의 뤼순 형무소
사형집행관 “제 3사 9호방 수감번호 26번, 형 집행을 시작합니다. 교도관, 위치로!”
두 명의 교도관은 수감번호 26번이라고 불린 남자를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 교도관 중 배가 불룩한 사내는 그를 형이 집행될 의자에 앉힌다. 그렇다고 강압적인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이 의자는 아래로 떨어질 예정이다. 자신에게 몸을 맡긴 사형수를 얹은 채.
다른 교도관, 그러니까 뻐드렁니가 당장이라도 입술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사내는 밧줄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집행 도중에 끊어지기라도 하면 사형수에게 이만큼 괴로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힘든 일을 두 번 겪지 않게 하는 게 직업상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형수는 죄수복 대신 하얀 수의를 입고 있다. 일반적이진 않다. 그의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교도관들에게 부탁했던 그것이다. 물론 수의를 맡기며 적지 않은 금액의 수고비도 줬을 것이다.
교도관들은 익숙하다는 듯 무표정하게 밧줄을 사형수의 목에 감는다. 눈을 맞추거나 동정의 말 따위는 건네지 않는다. 사형수랑 눈이 마주치면 귀신이 붙는다는 속설이 괜히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사형집행관 “혹시 마지막으로 수감번호 26번에게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거나 기도를 드릴 분들은 잠시 나와 마지막 배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정적만이 흐른다.
이때 제법 계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참관석에서 일어나 사형수에게 다가간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그의 이름은 데라우치 사이고. 자주 나올 이름이니 ‘사이고’라는 이름은 꼭 머리에 넣어 두자.
그의 얼굴을 뒤덮은 검버섯 탓일까? 그냥 얼굴만 봐도 평소에 얼마나 짜증을 달고 사는 사람일지 파악이 된다. 검버섯을 괜히 저승꽃이라고 부르겠는가?
사이고 “마지막으로 할 말은?”
찢어진 두 눈 아래 움푹 팬 볼, 피골이 상접한 두 볼 사이로 스치듯 미소가 지나간다. 바로 앞에 앉은 사형수와 사이고 본인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다.
사형수 “미친놈.”
사이고 “어허! 우리 대(大)일본제국이 무자비한 도살자인 네놈에게 자비를 베풀어준다는 데도... 역시 조선놈들은 배은망덕하다니깐!”
사형수 “자비? 지금 자비라고 했소? 이봐, 지랄도 이 정도면 옥황상제가 형님하겠소.”
사이고 “아니?! 이놈이 그래도!”
사형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으로 바꿔주시오! 나는 적군인 사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전쟁 포로지 살인범이 아니란 말이오!”
사이고 “또 그 소리군. 네 놈은 그저 살인마에 불과해. 네 놈한테는 한 발의 총알도 아깝지, 아깝고말고.”
비열한 미소가 새어나온다. 이번에는 애써 숨기려하지 않는다. 아니, 숨길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사이고 “그딴 소리나 할 거면 지금이라도 공범을 부는 게 어때? 혹시 또 알아...?”
우리 모두 안다. 무슨 말을 한들 사이고는 사형수를 애초에 살려줄 생각 따윈 없다는 걸.
사형수 “영감탱이 시끄럽고, 피차 바쁜 사람들인데 괜히 시간 끌지 맙시다. 아무래도 나는 오늘 갈 길이 멀 것 같으니.”
사이고 “크흥... 이놈이 끝까지...! 그렇게 객기 부리는 날도 오늘로써 끝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실은 네 놈도 무서워죽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
사형수 “이봐, 집행관! 이 인간 좀 치워주면 안되겠소? 할 말 다 끝난 거 같은데.”
그는 사이고의 말을 잘라 먹는다. 그저 무시하는 게 최선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투쟁이다.
사이고 “잠깐, 나는 아직 네 놈한테 할 말이 남았는데...?”
그는 사형수를 향해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뚜벅, 뚜벅, 뚜벅.
그리고는 혹시 누가 들을까 허리를 낮춰 사형수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댄다.
사이고 “마지막 선물로 기쁜 소식을 전해주마. 스승님은... 그러니까 네놈이 사살했다고 믿고 있는 히로부미 각하는 살아 계신다. 크흐흐흐.”
사형수 “...!”
애써 태연한 척 버티고 있던 그도 사이고의 말을 듣는 순간 얼어붙고 만다. 사형수의 당황한 표정을 확인한 사이고는 완벽한 승리를 만끽한다.
사이고 “크흐흐흐흐. 크하하하하핫! 구마이나 조센징노요오다토*. 크하하하하하.”
* 구마이나 조센징노요오다토: 우매한 조선인 같으니라고.
그는 사형수를 뒤로 하고 승자의 여유를 뽐내며 자리로 천천히 돌아간다. 그리고는 집행관에서 손짓을 한다.
사이고 “집행하도록.”
사형수 “아... 젠장. 대체 난 누굴 쏜-”
툭-
(0화 끝.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