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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Aug 12. 2024

일 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데

너무 길고 꼰대 같아서 망설여짐

태리타운을 하면서 힘들어 죽겠는데, 진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도 버틸 수, 아니 이젠 행복하다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얘들아 형이 하는 기다란 충고야, 잘 들어. 근데 문해력이 부족해서 다 못 읽겠으면 끝에 6 단락만 읽어“


***

열 한 살, 미술학원에서 내가 좀 한다는 걸 옆에 있는 중학생 입시반 형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열 아홉, 미대를 너무 가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포기했다. 반항을 해보고 싶었지만 당시 우리 집의 1순위는 나의 대입이 아닌 아버지의 치료였다. 그냥 져 드렸다.


스물 다섯, 인턴을 한다는 핑계로 미국으로 도망 갔다. 몰래 코리안타운의 미술 학원에 가서 SVA 편입을 알아 봤다. 비쌌지만 한국과 달리 수업이 몇 개 없어서 시간이 널널 ㅋ 알바하면 어찌어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날 때쯤 아버지가 위독하단다. 또 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때는 당연히 지는 게 맞다고, 그때도 지금도 그게 맞다고 여긴다. 다만 아쉬울 뿐-


스물 일곱, 영화제 스태프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행사 포스터 디자인이 매번 아쉽단 생각만 하면서.


스물 여덟, BTL이란 이름으로 하대를 받던 온라인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AE로 인턴을 했다. 광고보단 선배들이랑 농구를 더 많이 했다. 본부장이 농구할 때마다 데려갔다. 광고회사인지 농구회사인지 헷갈릴 정도.


스물 아홉, 한풀이라도 하듯 대학원에 가서 전공 대신 미대 애들이 듣던 디자인 수업을 전부 다 들었다. 그 과의 신입생들은 내가 지들 선배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은 현재 우리 디자이너 ㅋ 진짜 공부가 즐거울 수 있단 걸 처음 깨닫는다.


서른 한 살, 유학은 못했지만 국내에서 디자인으로 박사 과정을 해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또 아버지가 아버지했다. 의사가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거라 한다. 어머니는 정년퇴직. 가장이 되어야했다. 아들에게 부탁 같은 것조차 안하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화를 내셨다. 여름 장마가 한창이었던 2013년 7월, 구역삼 세무소 사거리 스벅 앞에서 미친 놈처럼 딱 한 번, 서럽게 울고는 8월에 네이버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는 9월에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매번 졌지만 잘 졌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다.


서른 세 살, 미련을 못 버리고 대리 명함을 받자마자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브랜드로서, 직장으로서 너무 좋아했던 네이버를 관뒀다. 처음 몇 년은 너무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웠고 아쉬웠던 게 솔직한 마음. 퇴사하고 한 동안은 동기 모임 핑계로 자주 놀러도 갔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미술 유학을 준비 했다. 포폴을 만들고, 아이엘츠를 시험을 봤다. 드디어 영국이, 브라이튼이 눈 앞에 있었다. 부족했던 유학 자금을 빨리 키우기 위해 투자(...)를 했다. 예상하다시피 준비했던 돈을 날려 버렸다.


서른 네 살이 되기도 전에 다시 직장인이 되어야만 했고, 신병난 예비 무당의 마음으로 그냥 마케터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물론 마케터로서의 삶은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그래도 해갈되지 않는 뭔가가 남아 있었다.


마흔, 묵묵히 마케터라는 정체성을 갖고 워커로서 살아오던 즈음에 목표이자 대상이었던 이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 죽음 앞에 모두가 비겁해 보였다. 나를 포함해서. 무력감이 의욕을 잡아 먹었다. 물론 몸에 벤 근면성실로 인해 쉬지 않고 열심히 마케터로서 돈을 벌었다. 제법 많이 모았다. 그러나 잡아먹힌 의욕은 쉬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살아내기 위한 도전.


마흔 두 살, 제주로 온 요즘 그 한풀이를 볼캡으로 제대로 하고 있다. 만들고 싶은 모자는 일단 그려서 샘플을 본다. 좀 괜찮다 싶으면 바로 생산 투입. 비싼 샘플비도 아랑곳 않고 일단 만든다. 허영, 위선, 허세 일도 안 보태고 샘플 나오는 날은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걸 설명한 단어와 문장이 부족한 게 아쉬울 따름.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메이커로서의 디테일은 특유의 성실력으로 커버한다 자부한다. 게다가 내겐 지랄 같은 손그림과 조악한 피피티 스케치를 최고의 작품로 치환해주는 동료가 있기에.


”이제 내가 왜 행복해졌는지 알겠지?! 너네들은 다 알지만 해석 및 요약 필요한 우리 조카를 위해 정리 들어간다“


***

위에 길게 늘어 놓은 것에서도 보이듯이 늘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쓰며 살았다. 소름 끼치는 재능이 없었어도 일할 때 남들보다 몇 시간씩 더 쓰고 살아왔기에 결과는 항상 좋았다. 그러나 행복하진 않았다. 남들이 갖고 싶은 걸 매번 ‘달성’하고 살았는데도. 왜 그럴까?


태리타운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행복은 기쁨의 강도(intensity)라고 믿고 살았으니까. 정복의 쾌락을 위해 순간의 기쁨을 늘 거세하고 살았던 것. 그런데 제주에서의 하루하루, 그러니까 빚쟁이가 되었지만서도 서울에서보다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왜냐고? 행복은 기쁨의 강도(intensity)가 아닌 빈도(freguency)란 걸 깨달았기에.


작지만 기쁜 일이 계속 모이니까 하루가, 한 달이, 그렇게 일 년이 행복해진다. 이 기쁜 일이란 건 진짜 사소하다. (그렇다고 갑자기 낭만파가 되어서 하늘 바다 별 이런 얘기하는 건 아님) 만들고 싶은 모자를 만들었더니 좋다는 사람이 서서히 늘어가는 것, 가게 문을 닫고 바다에 가서 멍 때리다 돌아와서 밤새 검수를 해도 행복할 수 있는 건 이런 사람들이 수다처럼 리뷰로, 디엠으로, 톡톡으로 말을 걸어준다. 그리고 또 산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걸 모자에 담았더니 그게 좋다고 한다. 모자를 안 쓰지만 산다고 한다. 모자 쓰기에 도전을 했고, 이제는 쓰게 됐다고 한다. 또 사서 주변에 준다고 한다. 뽕이 차오른다. 물론 이들의 수는 미미하다.


예전이라면 intensity를 달성하기 위해 고객의 규모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규모가 너무 중요하다. 규모를 키우는 것에 하루의 반을 투자하는 것이 그 증거!)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 행복해진다. 이 모자들에는 내가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이런 거 보면 천생 마케터임 ㅋ)


지난 수십 년을 돌아본다, 새로 깨달은 행복의 관점으로. 나는 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을까? 그림을 잘 그려서? (물론 그게 아니란 건 금방 깨달았지만ㅋ)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고, 이걸로 고객들과 수다를 떨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고, 그걸 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한 것 아닐까? 유명 브랜드의 디자이너(강도)가 아니라 내 이야길 들어주는 소비자들의 소소한 이야기(빈도)를 들을 수 있게 되어서.


그래서 요즘은 매일 모자 만들 생각에 하루가 채워져 있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쉼없이 일할 수 있게 된다. 찌릿찌릿하니까. 내 수다스런 모자를 또 어떻게 들어줄지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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