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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어요"

유연수, 사격선수(전 축구선수)_2부

by 신영웅

신영웅: 그럼 요즘 일상 이야길 한번 해볼까요? 요즘 하루 중 가장 기대하게 되는 시간이 있어요? 저는 퇴근하고 자기 전에 혼자 누워서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하더라고요. 눈에 안 좋다고 하는데 그 깨알 행복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유연수: 저는 실탄 쏠 때!!


또 사격 이야기다.


유연수: 처음에는 하루종일 자세 훈련만 했거든요? 실탄을 쏘고 싶은데 초보니까 저에겐 주지 않으셨죠. 그렇게 훈련만 하다가 첫 대회를 앞두고 실탄 10발 정도를 주시더라고요. 드디어 쏴 보게 된거죠!

실탄 얘기에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미소는 귀에 걸렸고, 휠체어에 고정된 다리와 달리 팔은 춤을 추듯 상황을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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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너무 재밌는 거예요. 실탄을 쏠 때의 그 느낌이! 그래서 훈련 시간이 진짜 빨리 가요. 처음에는 자세 훈련도, 공격발도 솔직히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요. 이걸 끝내면 실탄을 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잘 쏘고 싶으니까 이 훈련에 더 집중을 잘하게 되고 시간도 잘 가고!


하긴 사격이 일상이지. 듣다 보면 그가 얼마나 사격에 푹 빠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신영웅: 우리 사격 얘기 많이 했으니까 다른 이야기 좀 해볼까요? 요즘 새롭게 생긴 취미나 관심사 같은 게 있어요?

유연수: 예전에는 옷을 진짜 좋아했었는데 사고 이후에는 아무래도 집에 오래 있다 보니까 인테리어에 관심이 좀 생겼어요. 인스타그램으로 집 꾸미는 아이템 찾아보고.

신영웅: 저는 인스타그램 추천 피드에 죄다 모자만 떠요.

유연수: 저는 휠체어! 더 가볍고 튼튼한 건 없는지 찾다 보니 피드가 죄다 휠체어만.

신영웅: 전혀 생각하지 못한 쇼핑 리스트네요.

유연수: 그거 아니면 축구, 축구!


그의 입에서 먼저 축구 얘기가 나왔다. 너무 궁금한 질문이 있었지만 차마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


신영웅: 지난 번에 우리 만났을 때 축구 너무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 날도 사실 궁금한 게 많았는데 실례가 되거나 뭔가 괴롭게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딱히 물어보진 못했는데…

유연수: 저 축구 너무 좋아해요. 이야기 하는 것도요!


축구 얘기가 나오자 휠체어 손잡이를 두드리며 에너지를 뿜어낸다.


신영웅: 보는 거 괜찮아요, 축구? 괴롭거나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연수: 저는 사고 난 직후에도 괜찮았어요.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워낙 축구를 좋아하니까 자주 봤어요. 보다 보면 솔직히 엄청 뛰고 싶거든요? 욕구는 많은데-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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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미련이 없어요. 스스로에게 방금 또 물어봤지만 진짜 후회가 없어요. 정말 열심히 했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해서 그런지 진짜 요즘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축구장도 자주 가요.


정말 많이 사랑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는 놓아줘야 한다는 걸 아는 이의 표정이다. 솔직히 어찌 아쉬움이 없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가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란 게 저절로 느껴진다.


신영웅: 저는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래도 연수 선수의 마음은 전달이 돼요. 그리고 이 부분이 진짜 멋있다고 생각해요. 진짜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그가 5초 정도 말이 없다. 단 5초가 이렇게 길게 느껴지다니.


유연수: …너무 힘들었어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의식이 돌아왔을 때 축구를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또 막상 축구를 보잖아요? 그러면 너무 재밌는 거예요.


이 징글징글한 아이러니!


유연수: 게다가 이제는 제가 승부에 직접 관여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또 다른 관점에서 축구를 즐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축구를 보는 게 너무 재밌어요. 쉬는 날 경기장에 가서 선후배들도 만나고. 이제 진짜 축구를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에게 축구는 뜨거웠던 사춘기의 첫사랑 같았다.


신영웅: 제가 지난 번도 그렇고 오늘도 저보다 훨씬 어린 연수 선수가 커 보이고, 아 물론 실제로도 크지만! 멋있어 보이는 건 따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본인은 절대 못 보는 거!

유연수: …?

신영웅: 웃는 거 보면 이 사람이 요즘 진짜 행복하구나란 게 전해져요. 저는 연수 선수가 사고가 나고 꿈이 꺾였으니 어떻게든 버티는 삶이지 않을까, 그저 고통을 견디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거든요. 오늘 또 느끼는 거지만 진짜 행복해 보여요. 그리고 너무 맑아,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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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웅: 다시 생각해보니 연수 선수가 아니라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닥친 불행이 제게 전염이 됐고 제 인생도 같이 꼬였다고 생각해서 저는 버티는 수밖에 없는 삶이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아요. 어떻게든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삶. 물론 이 삶도 의미가 있지만 너무 버겁거든요.


나도 모르게 고해성사가 되어 버린다.


신영웅: 왜 지난 번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한번 얘기했잖아요. 저희 아버지 국가대표에 발탁 되고 얼마 안 돼서 폭행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실제로 태극마크를 달고 한 경기도 못 뛰고 은퇴하신 얘기. 이후에 교통 사고가 나고 장애까지 얻으면서 저희 아버지는 그때부터 꺾인 채 사셨거든요. 저는 그걸 보면서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며 어떻게든 발악을 한 거고. 연수 선수 보면 저도, 아버지도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요.


그에게서 묘하게 위로와 안도감을 얻는다. 취한 사람 마냥 속을 게워내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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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웅: 오늘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거! 아까 사격 얘기할 때도 그렇고 지금 축구 얘기할 때도 정말 감정이 터질 듯한 걸 느꼈거든요. ‘아, 이 사람은 매순간 행복에 진심이구나’하는 생각. 아, 죄송해요. 제가 인터뷰이도 아닌데 너무 주저리주저리.


유연수: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말씀해주시기 전까진 인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예전부터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거고. 잘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즐거우려고.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에 축구 선수들은 많이 맞았거든요? 감독님이나 선배들한테 맞고 그만두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근데 저는 그냥 축구가 너무 재밌는 거예요. 골도 넣고 친구들이랑 같이 뛰는 것 자체를 즐겼던 것 같아요.

신영웅: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를 못하게 됐잖아요.

유연수: 지금도 똑같아요. 저도 이렇게 된 게 화도 나고 답답하죠. 가해자도 야속하고. 그렇지만 이제는 사격이 너무 재밌으니까, 하고 싶으니까! 여전히 어렵고 잘 하진 못해요. 총이랑 제가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진 않더라고요. 맥박을 컨트롤 못하면 그게 바로 경기 결과로 나오니까. 그렇지만 재밌으니까 열심히 하고, 그래서 또 행복하고.

신영웅: 사격이랑 축구 중에 뭐가 더 힘들어요?

유연수: 당연히 사격이죠. 숨 한번 잘못 쉬어도 경기가 엉망이 되니까요. 정말 정교한 스포츠 같아요. 챙길 게 많다는 걸 새삼 느껴요. 물론 축구도 섬세하지만 그래도 16년 넘게 해서 좀 익숙한데, 사격은 이제 시작 단계잖아요.


사격이 더 힘들다고 응석을 부리는 모습이 귀여우면서 동시에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대충 하는 법이 없다는 반증이니까. 사실 <유퀴즈> 출연 이후 알아보는 사람도 늘면서 적당히 ‘패션’ 스포츠 스타로 살아가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시쳇말로 사연 팔이. 그러면서 유명세를 만들어 사는 삶의 방식이 더 풍요로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도전이었다.


신영웅: 기왕 축구 얘기 나온 김에 은퇴식 이야기 하고 싶어요. 제가 연수 선수를 처음 본 날이거든요. 조카들이랑 놀러 갔다가 진짜 저희 전부 엉엉 울었거든요. 연수 선수도 많이 울었잖아요.

유연수: 저 진짜로~ 진짜 안 울 줄 알았어요.

신영웅: 근데 엄청 울었죠(ㅋ)

유연수: 그 날 비도 왔잖아요. 사실 비 오면 경기장에 많이 안 오시거든요? 그래서 그냥 가볍게 그동안 응원해주신 팬분들한테 감사했다는 인사하고 돌아와야지 생각했단 말이죠?

신영웅: 근데 왜 그렇게 울었대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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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경기 끝나고 전광판에 제 영상을 틀어주시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 시절까지 다 스쳐지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탁 터지더라고요. 그리고 관중석을 봤는데 비 때문에 다 가셨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이 계시더라고요. 그때 진짜 감사하다는 마음이 어떤 건지 깨닫게 됐어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신영웅: 그 날 무슨 얘기했는지 기억나요?

유연수: 잘 기억이 안나요. 마이크는 잡았는데 계속 눈물이 나서. 웃으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왔다가 울보가 됐죠.

신영웅: 제가 연수 선수를 모티브로 모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 날 해준 얘기 때문이었어요.

유연수: 오? 그랬군요. 근데 제가 뭐라고 했죠? 전 기억이 안 나서.

신영웅: 너무 큰 사고였고, 사실 모두가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착잡한 일이었잖아요. 그런데 연수 선수는 위로 대신 자신의 새로운 도전에 응원을 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열심히 할 거니까 지켜봐 달라고. 이게 뭔가 너무 멋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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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너무 좋게 봐주시는 거예요. 사실 저도 처음에는 운동이 아니라 다른 일을 알아봤어요.

신영웅: 아, 그래요? 어떤 일?

유연수: 장애인이 되면 주로 직업으로 많이 하는 것들이 있대요. 편의점, 복권방 같은 것들요. 정부에서 지원도 해주니까. 저도 처음엔 너무 힘드니까 그냥 편하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죽어라 살았으니 조금 꿀 빨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죠.

신영웅: 그런데 왜 안 빨았어요, 꿀?

유연수: 흥미가 안 생기더라고요. 재미가 없을 것 같은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병원에서 탁구를 치게 됐어요. 환자들끼리 탁구 대회가 열렸는데 지니까 승부욕이 막 타오르는 거예요. 열불이 나는 거죠. 자꾸 지니까 짜증까지 나더라고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


대답 대신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꼼히 들어본다.


유연수: 사고난 것보다 지는 게 괴로운 거예요. 자꾸 지니까 내가 사고를 당했는지, 휠체어를 타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기고 싶다, 잘하고 싶단 생각만 드는 거죠.


승부욕의 화신. 이런 사람이 승부를 벗어나 복권방에 있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유연수: 그래서 아버지랑 둘이 연습을 했어요. 역시나 제가 계속 지더라고요. 진짜 그때는 열 받은 기억 밖에 없어요. ‘왜 못 이기지? 뭐가 문제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이 생각만 계속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혼자 전략도 짜고 연습도 했어요. 조금씩 실력이 늘더니 서서히 이기기 시작한 거죠. 저는 이 모든 과정이 너무 재밌었어요. 뭔가 살아 있는 느낌…!

신영웅: 다시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거군요?

유연수: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가 아시안 게임이 한창일 때였어요. 안세영 선수, 신유빈 선수 경기 챙겨보다 보니까 저도 하고 싶어지는 거죠. 패럴림픽이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죠. 다시 뭔가 쿵쾅 거리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나는 꿀 빨면서 살 팔자는 아닌가 보다~ 그때부터 어떤 운동을 할지 적극적으로 찾아 다녔어요.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님도 만나고 다양한 종목을 체험해 봤어요.

신영웅: 사격으로 결정한 이유는? 지금 얘기만 들어보면 탁구도 잘했을 것 같은데.

유연수: 제가 팔이 길거든요. 골키퍼를 했던 것도 팔이 긴 장점 때문인데, 사격이 팔이 긴 게 유리하더라고요. 자세를 잡을 때 골반에 받칠 수가 있어서 더 안정적이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한테 많은 조언을 해주신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님이 사격 선수시고. 게다가 메달 리스트.

신영웅: 금메달이 아른거렸군요?

유연수: 단순히 메달보다 저한테 희망을 많이 심어주셨어요. 본인도 23살 때부터 장애인 사격을 시작했다고. 제게 새로운 목표를 생기게 해준 분이죠.

신영웅: 그럼 목표가…?

유연수: 패럴림픽 금메달입니다!

신영웅: 그럼 현재 실력이…? 메달을 딸 수 있을 정도인가요?

유연수: 15명 중에 꼴등입니다!


너무 뜻밖의 답변에 실망한 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유연수: 아직은 꼴등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냉정한 거죠. 그리고 그게 맞죠. 제가 꼴지란 건 사격이 그냥 몇 번 훈련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는 거죠. 딱 훈련만 만큼 나오는 거니까. 아직 저의 시간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메달을 따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죠. 지금 제 실력으로는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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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저 멀리 있는 목표를 보기 보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상대를 먼저 잡는 걸 목표로 운동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워가다 보면 저에게 맞는 위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게 이런 거거든요. 홀린 듯이 빠져서 미친 듯이 하는 거요. 이건 진짜 자신 있어요.


꼴지라고 말하는 표정에서 ‘당당한 수줍음’이 흘러나온다. 자신이 하는 업에 대한 존중과 동시에 타고난 승부욕이 그를 더 훈련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2부 끝. 3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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