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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따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유연수, 사격선수(전 축구선수)_3부

by 신영웅

신영웅: 요즘 DM으로 메시지 많이 받으시죠? 어떤 내용들이에요? 악플도 많을 텐데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유연수: 네, 응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근데 신기한 게 있어요. 욕 하는 분은 없더라고요.

신영웅: 우와… 예수님, 부처님한테도 악플 다는 게 한국인이란 말이 있는데 이건 좀 신기하네요.

유연수: 언젠가는 달리겠죠? 그래도 지금은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감사하죠. 보면서 동기부여도 되고. 제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게 만들어주는 힘 같은 것이랄까?

신영웅: 그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은 게 있을까요?

유연수: 얼마 전에 받은 DM 중에 그런 분이 있었어요. 매번 실패만 해서 늘 포기만 하고 살았는데 제가 새롭게 도전한다는 걸 보고 다시 한번 용기를 얻었다고요. 응원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제가 오히려 응원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동시에 목표가 생겼어요.

신영웅: 금메달 말고요?


자세를 고쳐 앉는다.


유연수: 어쩌면 더 중요한 목표일지도 모르겠어요.

신영웅: 더 궁금한데요?

유연수: 저도 힘들 때 옆에서 해준 응원 덕분에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살고 있잖아요. 제가 이제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요. 저를 보면서 다들 응원과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고.

신영웅: 맞아요. 이게 바로 응원의 힘이죠. 응원은 전염병 같아요. 퍼트리면 퍼트릴수록 계속 자라나는. 그래서 태리타운이 모자에다가 응원을 담는 이유기도 해요. 작은 응원이 누군가에겐 큰 동기부여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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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아~ 저는 몰랐어요. 그냥 모자가 편하고 가벼운데 만듦새가 좋다 정도만 생각했는데…!

신영웅: 이 싸람이! 우리 모자 이름이 제시(Jesse)인 건 알죠?

유연수: 에이 그건 알죠. 제시 오언스에서 따온 이름, 그때 톡으로 얘기 나눴잖아요. 육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불리는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그때 자료 주신 거 보고 이거다 싶었죠.

신영웅: 게다가 흑인으로서 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금메달 4관왕을 차지한 선수니까 국적을 떠나서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 같아요. 제시 오언스가 단순히 금메달 리스트라서 금메달 따오라고 붙인 건 아니니까 부담은 갖지 않으셔도 돼요.

유연수: 4관왕 해야 하는 줄 알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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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웅: 사람들은 그저 최초의 흑인 금메달리스트로만 기억하는데요. 사실 제시 오언스가 금메달을 딸 때 옆에서 응원을 해준 사람이 있어요. 바로 경쟁자이자 독일 출신의 백인 선수인 루츠 롱!

유연수: 아아아! 그 얘기 알아요 저도! 제시 오언스가 탈락 위기일 때 루츠 롱이 조언해줘서 결국 본인은 은메달에 머물렀다고.

신영웅: 맞아요. 저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루츠 롱이 되어주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지치거나 방황할 때 우리가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주면 어떨까 하는! 다들 자신의 인생에서 금메달을 따는 제시 오언스가 되라고. 그리고 수익금의 일부도 저소득층 전동휠체어 수리비로 보태고.

유연수: 좋은 거 같아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인데 이렇게 함께 해주시니까 든든하고 외롭지 않아서 좋네요.

신영웅: 아까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고 했을 때 저 혼자 속으로 소름이 쫙~ 내가 준비한 멘트인데 본인이 치고 나오니까!!

유연수: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저 진짜 과분하게 많이 받았거든요.


그가 순간 울컥한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듯 하다.


유연수: 사고 나고 많은 분들한테 응원과 사랑을 받아서 저도 꼭 갚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뼈 저리게 깨달았으니까요.

신영웅: 누가 보면 우리 짜고 치는 줄 알겠네! 이렇게 통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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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질문만 남았다.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이라서 마지막으로 미뤄뒀다.


신영웅: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만나기만 하면 엄청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벌써 3시간이 넘어서. 슬슬 마무리를 해볼까요?

유연수: 좋습니다. 더 이야기 해도 좋지만 슬슬 배고파서~

신영웅: 얼른 끝내고 밥 먹으러 가시죠.


괜히 변죽만 울린다.


신영웅: 혹시 말예요. 호옥시-


계속 뜸을 들인다.


신영웅: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가장 하고 싶어요?


의외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이 나온다.


유연수: 저 이거 진짜 골백번도 더 넘게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부모님한테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그냥 지금이 좋아요. 굳이 안 돌아가고 싶어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유연수: 사실 불편하죠. 아까 화장실에서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대소변 보는 것도 불편하잖아요. 되게 일상적이고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 불편한 일이 되는 삶이니까. 엄마한테 딱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나 진짜 괜찮아. 나 지금 행복해.”

신영웅: 아… 아…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는 평온해 보였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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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 저 꿈도 매일 꿨어요. 다시 뛰는 꿈, 축구하는 꿈을 매일 꿨어요.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발언의 연속. 이때까지만 해도 믿지 않았다, 끝까지 듣기 전까진.


유연수: 사고 이후로 가족이랑 정말 가까워진 것 같아요. 물론 예전에도 좋았지만 이제 ‘진짜 가족’이 된 것 같아요. 사격을 열심히 하지만 제가 뭘 해내서 행복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기에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뭣보다 그냥 제 옆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더 중요하고 행복한 거죠. 제가 총을 잘 쏘는 거? 그래서 금메달 딴다? 기쁜 일이죠. 그런데 그것만으로 행복이 완성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 표정을 보더니 그가 말을 이어간다.


유연수: 너무 뻔한 얘기죠? 근데 그 뻔한 걸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열심히 해서, 메달을 딴다고 했을 때 함께 축하해줄 제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행복한 것 같아요. 메달 아니고 사람. 그걸 깨닫게 해줬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고요. 돌아가면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모르게 될테니까.


알 듯 말 듯. 요즘 내 고민과 맞닿아 있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신영웅: 아… 아… 오늘 생각이 많아지네요. 잠들기 전까지 엄청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요.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 해도 될 것 같아요. 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아… 아…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구는 건 자신 있는 나였지만 이때 만큼은 그냥 와르르. 마지막 질문에서 그동안 내가 가졌던 후회와 미련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물을 한 잔 들이키고는 정말 도망치듯 인터뷰를 정리한다.


신영웅: 자, 그럼 마지막으로 응원 한 마디 해주세요. 연수 선수처럼 하루 아침에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 혼란에 빠져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유연수: 휴우, 우선 쉽지 않네요. 바닥에 고꾸라진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까. 그런데 조금 흔하지만 그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시련이란 건 항상 이겨낼 수 있을 만큼만 준다고. 버티는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버텨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그 힘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실린다.


유연수: 사람들은 제 인생 그래프가 곤두박질 쳤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든 계속 바닥이라고. 그런데 제가 느끼는 제 인생 그래프는 사고를 기점으로 지금 계속 올라가고 있거든요? 불편함과 불행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신영웅: 사람들은 이걸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유연수: 행복을 너무 성공이랑만 연결시켜서 그런 것 같아요. 저희 감독님이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너무 미쳐서 하지 말고 재밌게 하라고. 저는 그 말에 다 담겨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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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인터뷰를 한 게 5월 말, 벌써 3개월 가까이 지났다. 그 사이 제시는 출시했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매출이 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행복한 일인가? 물론 좋은 일이다. 회사가 성장하고 있고, 우리의 캠페인이 퍼져 나가고 있으니. 예전의 나라면 여기에 취했을 것 같다. 그러나 연수 선수를 통해 조금 달라진 게 생겼다.


과거의 나는,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닥친 시련에 대해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며 행복을 발견할 기회로 삼지는 못했다. 우리 가족은 왜 시련의 시간에 함께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인터뷰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계속 되뇌였다.


행복은 강도Intensity가 아닌 빈도Frequency란 말이 스친다. 나에게 있어 불행을 탈출하는 방법은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부와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어머니도 나도 서로를 희생해 왔다.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목표로 했던 것에 가까워지는 듯 하지만 늘 행복은 옆에 없었다. 대학에 합격을 하니 취업이라는 미션이 다가왔고, 취업을 하니 승진과 같은 새로운 미션이 계속 추가됐다. 행복은 늘 멀리 있었다.


연수 선수를 만나고 알듯 말듯한 이 모호함을 깨뜨리고 싶어 아내에게 물어봤다. 아내가 해준 말에서 연수 선수가 내게 하려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조금 깨닫게 된 것 같다.


나: 자기는 언제 행복해?

아내: 그건 잘 모르겠고,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생각해. 오늘은 뭘 해야 내가 즐거울까? 그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실제로 그걸 할 때 너무 하루가 벅차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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