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 만들다가 멈춘 마케터에게
강연을 가면 Q&A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이 “마케터들은 어떻게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이다. 특히 마케팅이나 브랜딩처럼 협업을 통해서 일이 완성되는 영역 특성상 레쥬메나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자, 그럼 우리 같은 마케터들은 어떻게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받는 상당수의 뛰어난 마케터들은 '기록의 중요성'을 언급할 것이다. 나 역시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글쓰기였고, 많은 일잘러들이 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2021년, 지금의 나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사실 현장에서 내가 줄 수 있는 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자신의 일을 정리해 두라고 한다. 대신 시간이 한정적이라 설명이 불충분할 수 있으니 정리해서 따로 연락주시면 리뷰를 해 드리겠다고 한다.
그랬더니 실제로 꽤 여러 분이 자신의 퍼포먼스를 정리해서 보내줬다. 자신이 어떠한 회사를 거쳐 왔으며, 그곳에 있으면서 무엇을 했는지, 조금 디테일 있는 이는 자신이 해당 프로젝트에서의 참여도가 어느 정도인지 퍼센트로 기입해서 주는 분도 있었다.
특히 요즘은 노션으로 작성해서 많이 보내주더라. 끝도 없이 스크롤이 내려가는 카드뉴스부터 영상 광고 등 한 페이지 안에 잘 담겨 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아쉽게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그저 워드로 정리된 이력서만 못할 때가 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동창이랑 같이 카페에 앉이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왜 재미없다고 여긴 걸까? 이 역시 지극히 마케터의 관점에서 살펴봤다.
자, 포트폴리오가 보여지는 상황을 살펴보자. 일자리 또는 일거리를 주고 받는 상황이다. 그렇다, 이 역시 설득 커뮤니케이션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용자이다. 결정권자이자 이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는 사람이 뭘 보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
이 결정권자는 포트폴리오의 주인이 '무엇을 한 사람인지' 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일지 궁금한 것이 본질이다. 무엇을 했는지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미뤄 짐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 사람이 보여줘야 할 것은?
자신이 진행한 프로젝트의 시안? 카피? 데이터? 그것으로 그를 파악할 수 있을까? 그 결과물도 사실은 동료 디자이너, PD, 편집자 등의 손을 거친 공동의 결과물일텐데. 이런 부분 때문에 강연에서도 늘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일테고.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보내준 이들에게 늘상 같은 답메일을 쓴다.
안녕하세요, OO님.
보내주신 포트폴리오 잘 봤습니다.
주신 자료의 양에서부터 OO님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해왔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어 이렇게 오지랖을 떨어봅니다. 제 말은 정답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방향일 뿐이니 제 생각을 들어보시고 본인만의 증명법을 찾으시길 바래봅니다.
본론에 들어가서 지금 주신 내용은 OO님이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지 잘 보여집니다. 무엇을 만들어 내셨는지 쭈욱 나열되어 있으니까요. 여기에 OO님이 만든 그 무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어서 아쉽습니다. 이 결과물이 나오기 까지 OO님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마케터로서의 문제 해결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더 보여주면 어떨까요?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건 우리가 했던 그 What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나오기 위해 OO님이 고민하고 실천하셨던 How나 Why가 보여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 결과물이란 것은 각자가 가진 자신만의 필터를 거친 것이니까, 자신을 보여주는 데 더 효과적인 방법은 What 대신 How나 Why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필터를 기록하는 거죠.
자신을 증명하는 건 결국 내가 어떤 필터를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최고의 필터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급이 아닌 결의 문제이고 자신의 결을 잘 보여주는 게 성장과 증명을 위한 기본 바탕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 봅니다. OO님과 결이 잘 맞는 곳 또는 동료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오스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