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브레이크 테크놀로지
일본 비즈니스는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한 것으로 판단했다. 여러 기업과 큰 거래를 몇 개 진행을 하고 있고, 무료로 제공하는 게시판 서비스에는 온라인 광고 전문 회사와 협력하여 배너광고를 넣음으로써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고, 광고가 싫은 유저를 위해서는 유료 옵션도 마련하였다. 일본법인도 큰 문제없이 운영이 되고 있었기에 이제는 눈을 영어권으로 돌릴 타이밍이 온 것인가. 영어권에서도 CrazyWWWBoard 무료 서비스가 제공 중이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미국 뉴욕에서 IT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운 좋게 노브레이크도 국가지원 전시회 참가 사업에 합격하여 한국의 우수한 벤처기업들과 함께 첫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대학시절, 영어 공부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심지어 뉴질랜드로 유학을 다녀오면서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비자 발급이 쉽지 않았고 딱히 기회가 없었기에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영어권 공략을 위해서 준비할 것이 산더미다. 기본에 만들어 두었던 카탈로그와 제품 CD를 가다듬어 영문화를 진행하였고, 전시회를 어떤 스타일로 꾸미고 홍보를 해야 하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여러 이야기를 들은 결과, 일단은 관람객의 눈을 끌어야 한다.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우리의 존재를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눈에 확 띄는 티셔츠를 맞추기로 했다. 노란색 바탕에 등에는 큼지막하게 'Are you Crazy!' 문구를 넣었다. 당연히 의문문이라 물음표를 넣는 게 맞지만 Crazy라는 단어를 강조하기 위해서 마침표를 사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그 티셔츠를 입고 맨해튼을 활보하고 다녔으니 뉴요커들이 뭐라 생각을 했겠는가.
얼마 전 벨기에의 한 벤처기업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CrazyWWWBoard 제품에 대해서 극찬을 하며 잘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문의가 있어 수차례 이메일이 오가면서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는 관계가 되었다. 한 달 후 참가할 뉴욕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우리 회사 제품을 잘 아는 유럽 회사와 함께 전시회를 진행하면 어떨까. 동양인들만 있는 것보다는, 그리고 나 외에도 영어로 제품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멤버가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벨기에 업체에 문의를 넣었다. 다음 달 있을 뉴욕 전시회에 올 수 있는지. 와서 함께 CrazyWWWBoard 홍보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론 우리 측 요청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모든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을 하는 조건이다. 얼마 후 답변이 왔다. 뉴욕에서 보자고. 와우!
뉴욕 JFK 공항에 도착을 했다. 정부 지원으로 참가한 업체들은 출발부터 함께였으며 도착해서도 뉴저지에 위치한 호텔까지 렌털 버스로 함께 움직였다. 다음날 맨해튼에 위치한 전시장 'The Jacob K. Javits Convention Center'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맨해튼, 킹콩 영화에서 보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여러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온 센트럴 파크. 자유의 여신상, 뉴욕의 상징 노란 택시, 가장 핫 플레이스인 타임스퀘어 등등. 그야말로 신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아닐 수 없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12년 후 이곳 뉴욕에 정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지금은 맨해튼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너무 복잡하고 특유의 냄새가 싫어서. 하지만 유명 콘서트나 뮤지컬이 있으면 혼자라도 간다. 다시 2000년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첫날 전시 준비를 잘 마쳤고 저녁에는 다음날 있을 벨기에 파트너와의 미팅을 준비했다.
다음날, 마지막 전시회 준비를 마치고 벨기에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택시를 기다렸다. 꽤나 긴 줄이 늘어섰는데 약속시간은 얼마 안 남아 초조해하고 있던 상황에서 기다란 리무진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나 영화제 등에서 보던 아주 기다란 흰색 리무진이었는데 사실 고급 택시다. 가격을 물어보니 가까워서 그런지 많이 비싸지는 않아서 그걸 타고 약속 호텔로 향했다. 리무진 안은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고 각종 음료와 술이 준비되어 럭셔리한 BAR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경험과 함께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파트너 두 명이 손짓을 한다. 사실 동양인이 많지 않으니 쉽게 알아본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의 회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부터 4일간 있을 전시회 성격과 진행 방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했다. 또한 그들의 역할과 기대하는 결과에 대해서 조금 차갑지만 확실히 짚어주었고, 마지막으로 하루 일당에 대해서 재확인까지 마쳤다. 유럽인들과 공조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첫 순간인 것이다. 잘 되어야 할 텐데..
수많은 인파가 몰려왔다. 전시회 첫날부터 문전성시다. Wifi가 대세가 되어 각양각색의 무선 하드웨어 업체가 주목을 받았고 우리 같은 소프트웨어 업체도 많았는데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려고 별별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유럽 파트너와 함께 열심히 CrazyWWWBoard를 홍보하였다. 일본 전시회 경험을 바탕으로 카탈로그나 제품 CD를 가져갈 때는 명함을 받았다. 영어권에서 이미 사용 중인 서비스 사이트를 보여주며 왜 우리 제품이 인기가 많고 많이 사용되는지, 기업에서는 어떤 식으로 도입이 가능한지 등등 친절한 설명과 함께 팸플릿을 나눠주었다. 벤처기업의 원조인 미국이라서 그런지 강력한 소프트웨어 기업이 많았다. 사내 인트라넷 전문 기업에서는 이미 게시판 프로그램의 원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소통의 장을 구현하였고, 데이터베이스 전문 기업에서도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일본하고는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단 하나의 기능만을 제공하는 우리 회사 제품은 이미 구시대 유물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전시회에 참여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타사 제품들을 보면서 우리 회사 제품을 제삼자의 시선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라져야 한다. 노를 저어야 한다. 흐르는 강물에서 노를 젓지 않으면 후퇴한다. 나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가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가능할까. 이번 뉴욕 전시회는 제품의 홍보 성과보다는 나와 회사를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몇 달 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CES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역시 정부 지원으로 참가를 하였고, 뉴욕에서와 비슷한 콘셉트로 부스를 꾸미고 제품 홍보를 하였다. CES 전시회인 만큼 IT 전문 기업들이 총집합을 하였는데, 말로만 듣던 리눅스 전문기업 'Redhat'을 비롯하여 'Apple', 'MS', 'HP', 'Palm' 등 수많은 스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중에서도 'Palm'에서 판매하는 PDA는 단연 눈에 뜨였는데,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단말기에 여러 가지 앱이 깔려 있고 Wifi와도 연결이 되니 정말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앞으로 IT 세계는 무선과 손 안의 단말기임이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큰돈임에도 5대를 구매하여 한국에 가져가 연구 기자재로 사용하기로 했다. 지금의 무선 시대를 보면 그때 그 촉은 정확히 맞는 것이었고, 그때부터라도 합심하여 모바일 비즈니스로 방향을 잡았다면 훨씬 큰 회사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생긴다. '우물 안의 개구리'. 대전의 한 구석에서 조그만 사업을 했으면 알지 못하는 세상을 서울에 와서 알게 되었고, 서울에서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직접 보고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면 꼭 한마디 해주고 싶다. 가능한 많이 경험을 하라고. 인터넷을 통한 간접이 아닌 전 세계를 무대로 직접 경험을 하라고. 그 모든 경험이 본인의 미래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