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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수 Sep 06. 2021

분홍이 분홍을 어길 때

대학원을 들어오기 전과 후


분홍이 분홍을 어길 때, 그럴 때 분홍은 한사코 공기였던 자신의 전생을 따라 분홍의 몸을 빠져나간다. 그렇게 분홍이 텅빈 자리를 우리는 아직도 분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한 때 분홍이 있었다는 흔적. 그 흔적에 손을 대보고 분홍이었던 자리의 온기를 더듬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요즘의 나는 나이기를 어긴지 오래다. 분홍이 더 이상 분홍처럼 울긋불긋하거나 새하얗다고 감탄하지 못하듯, 타인의 죽음은 치사량의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봄, 여름이 갔어도 그 계절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바람이 불어서 말로는 시원하다 해도 그 시원함이 그 이전의 시원함과 무엇이 다른지, 그 이후의 시원함이 어떨지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바람도 흔적으로 투명해진 나를 그저 통과해 지나갈 뿐이다. 나는 누군가 묻는다 해도 저번 달 가장 행복했던 장면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고, 지난 주 목요일에 먹었던 점심식사가 어떤 맛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오늘 하루가 어떠할지를 머릿속에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삶은 실패한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를 당당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을 빠져나간 그것을 우리는 정말 분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찾아온 배반. 이대로라면 언젠가 나는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란 걸 예감한다. 그 전의 나와 그 다음의 내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이 글은 내가 나에게 부탁하는 자기소개서이다.








어릴 땐 천방지축이었기 때문에 어디든지 돌아다녔고, 돌아와 보고 들은 것을 부모님께 들려주길 즐겨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웃는 사람들의 표정. 중학생 땐 교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등교가 싫어졌고, 공부가 일상이 되어 공부하지 않을 핑계를 찾느라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게임을 즐겨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 <동물의 왕국>을 보며 라면을 끓여먹던 것이 이제와선 추억이다. 졸업할 무렵부턴 남들 다 그런다 하니 영어, 수학 학원도 다녔어야 했는데 거기서도 공부를 했다기보단 친구들과 군것질하는 재미로 지냈던 것 같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마치 큰 일을 한 사람처럼 기특하게 대접을 받았던 것이 이제와서는 사뭇 추억이다. 


- 어릴 때 말을 조리있게 잘해 어른들이 모두 재밌어했다는 것, 한 겨울에도 집밖으로 돌며 곤충이나 동물을 찾아다녔다는 것, 그리고 필리핀에 살며 여러문화권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것, 이 세가지는 이후 내 삶이란 뿌리에 깃든 양분이 된다. 수화력, 행동력, 친화력이라고 정리해놓을까.


고교에 들어서며 야간자율학습과 낯선 학급 분위기로 인해 의도치 않게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교과서 속의 글자를 읽어나갈수록 그 안에는 어떤 질서랄 것이 있었고, 그 질서가 묘사하는 세계가 나름대로 분명하다고 느꼈다. 시바타 쇼의 <록탈관 이야기> 같은 느낌이랄까.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했던 것들. 특히 기술, 미술, 도덕, 국사, 한자, 국어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과의 관계가 달라졌고 생활도 점차 어떤 궤도 위에 올랐다. 그것을 글로 쓰기 시작했던 것이 나에겐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였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학내외로 글과 관련된 여러 활동에 임했는데, 시를 필사한다든가 공모전, 백일장에 도전했고, 지역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며 궤도에 들어맞는 일들을 참여해나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문학과에 들어가 문학을 전공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그 부자연스러움의 자연스러움이 당시의 나에겐 유독 베어있었다.  


- 처음 부모님께선 내가 글을 쓰는 것에 공부하는 시간이 빼앗기는 것을 염려하셨기에, 독서실에 간다는 핑계로 전국의 공모전이나 백일장을 찾아다녔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고향 바깥의 도시 구경도 하고 스스로 학업이나 입시, 진로와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할 시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겐 귀한 균열이었다. 


국문학과에 들어오면서는 스무살의 문학도가 된 스스로를 온갖 모습으로 바꿔가며 마음껏 즐겼다. 그 겨울 크리스마스엔 혼자 롯데월드에 가 자이로드롭을 3번 연속 탔던 기억이다. 무엇이든 그것을 전부라고 느꼈던 당시. 삶이, 글이, 인문학이, 문학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무엇인지는 영영 알지 못했지만 그랬기에 그 무엇이든 과감히 결단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과제로 주어진 책을 읽었고, 내게 필요한 글을 적었으며, 축구, 글짓기, 노래부르기 등 여러 동아리에 들어 활동했으니 겉보기엔 온몸에 넘치는 젊음을 달래고 있는 여느 대학생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는 한 켠에는 마냥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면 꽤나 멋있을 것이란 환상을 길러왔던 나머지 방학 중에 틈틈히 한자, 영어, 중국어를 공부했는데, 21살 입대를 하며 그밖에 워드, ITQ, 한국사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외국어시험을 치뤄뒀던 것을 계기로, 제대 후 중국(상해와 남경)으로 유학을 갈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기억하기론 2016년 제대 후 가을학기엔 학점이 가장 좋았는데, 당시 교내 도서관자치위원으로 활동하며 학업과 외국어 공부에 몰입하느라 도서관에서 밤을 새던 기억이 생경하다. 


- 대학에서 뛰어난 스승님을 세 분 만나 '문학'과 '삶'을 아낄 수 있었다. 주로 고전소설이나 신화, 전설, 민담 등 구비설화를 통해 문학과 삶의 이야기를 접했고, 세 분의 답사나 학회를 따라다니며 사람을 대하는, 삶을 대하는, 나 스스로를 대하는 면밀함이라는 것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보았다. 


2017년 초 사드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으로의 유학길이 막혔고 남은 학기를 마저 다닐 것이냐 휴학을 할 것이냐 하는 갈등이 있었다. 얼른 졸업해서 자리를 잡으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협박으로 오해하고 집을 뛰쳐나나온 당시의 난, 휴학을 신청하며 명동 롯데면세점에서 중국인 관광객 대상 화장품 판촉보조로 일했는데 사드가 붉어지며 두 달 후엔 더 이상 고객이 들지 않자 일을 그만두었다. 그 무렵의 난 이미 신체검사도 받고 비자 신청도 끝났으며 호주 시드니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편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은 상태였다. 3월 11일 시드니 교외의 숙소에 도착했다. 다음 날 영문 이력서를 작성해 시내에서부터 돌아오는 길에 보인 모든 식당과 카페에 이력서를 돌렸다. 이틀 후 두 곳에서 연락이 왔고, 그 중 트라이얼 끝에 한 아시안 누들 바에서 서빙 일을 시작했다.


- 사람의 문맥에 대한 독해, 영어, 중국어 등 공부한 바를 처음으로 현장에서 사용해본 것이었으므로 대면대면하게 부족함을 채워나갔다. 모르는 것을 저지르곤 혼나서 배웠고, 혼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일에 대해서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와 나를 반기는 자리를 향해 갔다. 기대를 웃음으로 건내자 돌아오는 것이 나에 대한 기대였으므로, 함부로 주어진 젊음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17개 남짓한 테이블의 크지 않은 식당이었음에도 인도인 사장, 필리핀 매니저, 태국인 주방장, 중국인 와셔, 말레시아인 메인서버와 함께 일했고, 한국인인 나를 무척 반겨주었기 때문에 영어가 어색했어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으며, 그것도 두 달 후엔 영어가 익숙해져 일이 더욱 즐거웠다. 들을 수 없던 단골의 오지 발음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하자, 전화주문과 배달도 받으며 뭐든지 다 받아주는 레스토랑의 주요 인물로 각인 됐다. 그 당시엔 이미 호주법인의 한 법무사 사무실에서 중국인 이민자들의 이민서류를 번역하거나, 부산 테크노벨리에서 CSIRO로 출장 온 지자체의 통역 일도 맡아 출장을 다닐 만큼 그곳에 완벽히 적응했고, 친구도 다양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드문제가 풀려 중국 유학이 가능해졌다고 연락을 받은 6월 무렵 모아둔 돈을 풀어 호주 곳곳과 뉴질랜드 왕복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버지의 티켓도 함께 끊었다. 


- 낯선 도시와 낯선 사람들 틈을 유유히 걸으며 햇빛을 쐬던 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한밤 중의 바람처럼 도시 곳곳을 쏘아다니던 날, 아주 멀리라고 생각되는 실은 가까운 곳에 열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떠나 도착한 어느 마을, 자주다니던 식당인 듯 실은 처음 가본 식당에 앉아 브런치를 먹던 날, 놀이터 시소에 누워 낮잠에 든 날, 단골로 알게 된 중국인 친구들과 낚시를 갔던 날, 이런 빛의 기억들이 내 삶에 속속 들어찼다. 


시드니에서 시작해 멜버른에서 끝난 아버지와의 여행 이후에도, 나는 멜버른의 크고작은 반도들과 타즈매니아 곳곳의 소도시를 쏘아다녔고 높아보이는 산길에 올랐다. 그땐 대형마트에서 이미 텐트와 침낭, 조리기구를 구비해두기에 어떤 날엔 바닷가 아득한 절벽 위로 텐트를 치곤 별을 보며 밤을 새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엔 히치하이킹이 10번 이상 실패해 결국 밤새 캄캄한 도로 한복판에 앉아 나를 지나가 줄 다음 지나갈 차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타즈매니아 호바트 근교에서 한참 카우치서핑을 하던 차 가깝게 지내던 어느 지인의 부고 전화를 받고, 다음 날 티켓을 사서 급히 한국에 돌아왔다. 그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중국 유학 준비를 했고, 그 다음 달 말 8월 23일 비행기를 탔다. 오후 무렵 도착한 남경에서 택시를 타고 도심에 위치한 좁은 숙소에 들어섰고, 그 안에서 며칠간 앞으로의 유학생활, 이 도시와 공부하게 될 대학, 학과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땐 군대도 마쳤고 워홀도 다녀왔던 터라, 케케한 매연으로 휩싸인 이국 도시의 파리한 풍경이 내겐 마냥 뛰어들고 싶은 던젼 같았다. 


- 재밌게 보고 있던 책을 반으로 접거나 덮듯이 지인의 부고는 내 발길을 멈춰세웠다. 나는 그의 죽음 앞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갈 만큼 남은 여정을 즐길 수 없었다. 다음엔 이보다 더 한 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면, 멈추었던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나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며칠 뒤 당시 한인유학생 회장의 도움으로 무사히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었고, 교내에 자리를 잡는대로 학기가 시작하자 여러 신입생 행사에 참여하며 영어와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위주로 수강했다. 수업이 끝나면 같은 학기 들어온 다른 나라 친구들과 어울리며 펍에 가거나 한 방에 모여 술을 마시며 인생의 의미와 지구의 비좁음을 가늠했다. 방중에 친구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면 그제서야 문을 걸어 잠그고 중국어를 익혔는데,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낼 때마다 들을 수 있는 수업의 양과 난이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3학년을 마칠 무렵엔 어느 정도 회화가 가능해져 샤먼, 양주 등 강남 지역으로 여행을 다녔고 4학년 초엔 먼 청두 친구네 고향집에서 며칠 간 머물며 춘절을 맞이하도 했다. 4학년 1학기 때 수강하던 국제사회학 강의에서 한 교수님의 소개로 남경의 전기자동차 회사 BYTON에서 여러 국적의 UX팀원들과 UX연구 인턴을 시작했고, 6개월 후 제출했던 중국과 한국의 민간고사를 비교분석한 100장 남짓의 논문이 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학부를 무사히 마쳤다.


- 대학에 들어오면서는, 문학에 정통할 것, 외국어에 능란할 것, 젊음에 당찰 것, 이 세가지 목표를 가졌는데 그 모두를 이루었다. 전공에서 높은 학점을 받았고, 중국어와 영어가 우리말처럼 편해졌으며, 군대-워홀-유학을 차례로 20대의 전반부가 알찼다. 문학을 익혀 사람의 핵심적인 맥락을 짚을 수 있었고, 외국어를 익혀 한 가지 대상을 여러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며, 젊음을 익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강력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본래는 대학을 졸업하며 남경 현지의 한 포워딩사에서 영업 일을 맡게 되었는데, 학부졸업의 신분으론 비자가 곧장 나오지 않자 회사와 타협한 후 잠시 한국에 돌아왔고, 그 김에 아예 정착하며 여행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아침 8시에 명동에서 중화권 관광객 40명을 버스 한 대에 태워 쁘띠프랑스, 남이섬, 레일바이크 등 코스를 돌며 영중으로 소개했고, 남은 시간엔 이력서를 고치며 취업을 준비했다. 그 다음 달 끝끝내 3차 면접까지 붙어 들어간 곳이 서울의 한 음료제조 및 수출사였고 거기서 러시아권, 호주권, 중화권 해외영업 업무를 맡으며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생의 공식적인 첫 취업이었으므로 스스로에게 기대가 컸으나 정작 수중에 움직인 액수에 비해 내가 한 달 간 일해 모은 돈의 양이 적당치 않다는 것을 느끼자, 그 다음의 33년이 눈앞에 훤하게 그려졌다. 이런 게 과연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일까? 이런 회의감이 빠르게 들어오기 시작하자 학부 때 그나마 재밌게 공부하던 문학에 눈을 돌려 다시 대학원에 지원했고, 시험을 운좋게 통과해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 대학을 입학하기 전엔 문학도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대학을 졸업하기 전엔 외국어능력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세상은 그 이전의 세상과 달랐다. 그 다음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꿈이 명확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 세상의 낙차가 컸기 때문이다. 이전 세상은 주어진 것이지만 나도 그 안에서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세상이 비록 주어진 것이었을지라도 나는 그 '주어짐' 자체에 대한 일종의 환멸감을 느꼈고, 더 이상 열공-입시-취업의 제도권 루트를 밟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시간을 두고 그것을 고민해보고자 대학원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후 퇴사 절차를 밟으며 일전에 면접까지만 갔다 알고 지내게 된 대표와 연락이 닿아 한 달 정도 그 측 회사의 물류비 절감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고, 그 회사를 나오며 나를 아껴주던 한 동료에게 너는 글을 잘 쓰니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경력을 쌓아보란 권유를 듣고는 한 전문가 사이트에 계정을 만들어 카피라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대학원에 들어와 강의를 들으며 과연 학업과 병행할 수 있을까 싶었던 그 일은, 일전의 UX연구원 경험, 여행가이드 경험, 해외영업 경험에 힘입어 거래선이 30곳을 넘기고 홈쇼핑 등 TVC 카피를 겸하게 되며 본의 아닌 호황을 이루었고 거기에 장학금이 더해지며 이곳 대학원에서의 공부도 현실적으로 할만한 것이 되었다. 비대면이었음에도 질문과 발표에 유독 적극적이었고 레포트에 물건을 떨어뜨리듯 무게감을 실어 호소력을 피력한 만큼 학점도 우수했고 선생님들께서도 좋게 평가해주시어 3학기 만에 석사과정을 모두 수료할 수 있었다. 그 중간엔 카피라이터가 아닌 AE로 광고대행사에서 건기식, 게임 업체의 어카운팅을 맡으며 2개월 남짓 출퇴근 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 이렇게는 결코 많은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이런 저런 일을 일으켰다. 연구실로 돌아오며 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읽는 글과 익힌 문장들을 써먹을 수 있을지 궁리했고, 그런 점에서 내 글이 동료들에겐 위협적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는 처음부터 연구가, 취직이, 사업이 아니라 그저 돈을 많이 벌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다음 절차대로라면 석사과정을 마무리 할 졸업논문을 한 편 적으면 된다. 작년 겨울방학부터 그 작업에 매진하며 문학과 문화산업의 중간지대를 개척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올 3월엔 '콘텐츠IP와 이야기소비'라는 주제로 학과 내에서 주제발표를 마쳤다. 그리고 지도교수님과 상의 하에 본격적인 논문 작성에 들어간지 5개월 째,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서론과 본론1, 2의 내용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10월의 중간발표를 한참 준비하고 있어야 할 때인데, 아직 논문의 제목과 개요조차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몇 차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바를 10장 내외로 요약해 교수님과 상의했으나 학계에 오래 몸담고 계신 교수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그리고 학계에 오래 몸 담을 예정인 다른 선배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그분들은 나의 주제가 매력적이거나 결코 의미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음을 그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5개월 내내 100편이 넘는 논문을 읽었고 30권이 넘는 책을 읽었으며 5편이 넘는 서론을 적어냈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어쩐지 나는 제자리 걸음 중이다. 20대가 다 가서 마음이 시급한데. 아침에 연구실에 들어와 저녁까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다가 방으로 돌아와 잠든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서 점점 내 안에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강력한 줄 몰랐던 그 질문이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틀리고, 회사나 대학은 망할 것이고, 나는 죽는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 나는 돈을 벌고 싶었던 걸까. 아니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려면 마음이 부유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언가를 익히거나 배우거나 얻어가기 보단, 나눠주고 가르쳐주고 내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집착하거나 붙들고 있는 것이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무언가를 원한다기 보단,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라든지, 자산이라든지. 그 다음은 알아서 척척 될 일이다.









한 학기 내내 내 모습을 지켜봐온 옆 자리의 후배는 10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라고 조언했고, 일 년 내내 내 모습을 지켜봤던 선배는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쉬다 오라며, 그러고 한참이 지나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그때 떠날 것을 권했다. 학부 때 같은 동아리에서 유독 후배들을 잘 챙기던 한 후배는 나에게 저는 왜 선배 같이 일하고 움직이는데 눈이 초롱초롱한 사람이 적요한 대학원에 들어갔는지 처음부터 의아했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10년 후의 내 모습은 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심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란 건 가진 게 없어도 귀한 걸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란 것은 귀한 걸(돈으로 바꿀 수 없는 내면) 내어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란 의미 뿐 아니라 재무재표를 읽고 손익의 사리분별로 감정을 제쳐둘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 잠시 쉬다 오라고 하였으니 목요일이나 금요일 무렵에 서울을 떠나 지방에 며칠을 머물며 내게 묵은 답답함을 꺼내볼 계획이다. 그것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들어봐야 할 것이다. 끝으로 후배 말마따나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만약 이게 아니면 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때 내 표정과 눈빛이 지금의 이것과 정확히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 따라서 예상 가능한 미래를 모두 적어놓는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과 그 다음 것을 남겨놓고 나머진 모조리 버리자. 그러곤 세상에 잊고 산 모든 아름다움을 향해 가벼워지자. 그렇게 모든 것이 분명해졌을 때 마음은 부유해질 것이고 그 뒤론 척척 내 몸이 알아서 다음 일을 해낼 것 같다. 이게 바로 나라며. 


이대로 대학원을 그만두면 나에게는 어떤 것이 남겨지는가. 대학원 수료의 학위가 남겨질 것이고, 녹슨 영어와 중국어 실력이 남겨질 것이고, 눈대중으로 서사를 가늠하는 능력과 글쓰는 능력이 남겨질 것이다. 이제 이것들을 가지고 나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수정해 광고 카피라이팅 회사에 지원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해외브랜드를 담당하며 글쓰기, 외국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방송사나 영화사 게임사나 콘텐츠사의 시나리오 작가로 취업해 말단에서부터 문장을 하나씩 갈고 닦으며 언젠가 특유의 기질을 가진 작품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취직과 커리어 쌓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자산가들이 그렇듯 내가 가진 자산을 검토하며 투자나 사업의 길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당장은 무직으로 대출을 받아도 큰 돈을 꺼낼 순 없기에 작은 투자가 가능한 주식이나 채권을 알아봐야할 것인데 그것들을 예측하는 능력이 문학을 전공한 나에겐 있을리 없다. 오히려 그 돈을 가지고 내가 분석하고 믿은 바를 실천하는 사업을 운영해보는 것이 그나마 적극적인 나의 적성과 어울리는 일이리라고 생각된다. 자 그렇다면 이 두 방향으로 '에어백'을 만들어볼까.


- 행복한 삶이 목표라면 경력을 인정받고 취직을 해 나만의 커리어를 쌓으며, 내가 살아온 삶을 긍정해나가는 일이 더욱 어울리겠지만, 풍요로운 삶이 목표라면 홀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스스로 사업을 운영해볼 만큼 수환을 익혀야 한다. 두 일 중 내가 진정으로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첫째, 취업해 커리어를 쌓는 루트다. 이 루트의 행복은 타인의 인정에서부터 온다. 먼저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수정하고 영문, 국문, 중문 판본을 만들고 원하는 기업리스트와 포지션을 10개 내외로 정해 엑셀로 정리한다. 그 중 가장 가고 싶은 국내외 기업 5곳의 최근 이슈와 팀이슈를 PR을 통해 체크한 뒤 인사담당자에게 콜드메일을 보내거나 채용 시기를 확인하여 지원한다. 빠르면 두 달 늦으면 네 달 이내로 결과값이 주어질 것이고, 그대로 외국계든 국내든 직장을 다니며 팀에 적응해나간다. 사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결하면서 주변의 동료들과 회사에 인정 받고, 그게 잘 된다면 업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을 해도 그 일을 사랑한다면 몇 년 후엔 좀 더 넓은 풀의 업무환경이 주어질 것이고 그 자리에서 계속해 나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면 언젠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전문가가 된다. 그건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경우일 것이다. 이 경우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길을 택하고야 말까. 


- 업계에서 인정 받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달콤한 유혹이다. 문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업계에 몸 담고 삶을 내걸어 그 자리에 도전함에도 무엇이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하는가. 수많은 사람들끼리의 경쟁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 강력한 현실, 바로 편안함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일해본 경험이 있으니 그 반대의 경우도 예측해보자. 먼저 취업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원하는 이상은 높고 현실은 그렇지 않을수록 더욱 더. 계속해서 떨어지는 자신을 보다가 어느 중간 단계에 놓인 기업과 타협하겠지. 높게 올려받은 연봉을 핑계로 커리어는 거기서부터 쌓고 차근차근 이직을 도모하면 되겠다 생각하지만, 거기는 거기만의 페이스로 군림하기 때문에 말리진 않더라도 커리어를 쌓는다는 말 자체가 어색할 만큼 시시콜콜한 작업과 안온한 일상이 보장될 것이다. 그러다가도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누군가의 눈에 띄어 더 넓은 풀의 업무환경으로 이직할 수 있게 된다면 인정의 루트를 밟겠지만,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드라마는 순간이다.) 그때의 나는 몸 여기저기에 묻힌 세상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에 사로잡혀 관성에 의한 삶을 살다가 운이 아주 좋다면 무언가에 머리를 맞고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미 세상의 아름다움을 잊고 산 사람의 냉기가 느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최악(내가 나에게 벌인 짓이기 때문에)의 상황을 용납할 수 있는 류의 사람이 아님을 잘 안다. 그럼에도 이 경우로 치달을 확률은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더 높을 것임에 틀림없다. 


- 어쨌든 두 경우 모두, 나의 행복을 안정된 형태로 배달해주며 그 안정 바깥을 넘어선 어떤 모험이나 무언가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구성원으로서 갖는 최고의 행복일 것임을 보장하며, 그 행복을 포기한 순간 당신의 인생은 드라마도 액션도 아닌 다큐멘터리가 될 것이다라고 개츠비처럼 경고한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드라마나 액션이 아니라 SF판타지와 스릴러이고, 월급을 받는 순간 그 장르는 재밌더라도 끝내 인상깊을 수 없다. 


둘째, 목돈으로 사업을 차리는 루트다. 이력서고 포트폴리오고 노트북이고 사진첩이고, 먼저 모든 것을 제자리에 정리해 놓는다. 그 다음 내가 가진 자산이 무엇인지 정확히 엑셀로 정리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규모와 크기를 가늠해볼 것이다. 다음 평소에 생각해놓았던 종목 3가지 정도를 신문이나 검색을 통해 좀 더 꼼꼼히 알아본 뒤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종목과 방법을 몇 가지 추려, 절차를 글로 정리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론상의 준비는 모두 끝난다. 그 다음 그 중에서도 가장 실행 가능한 것을 골라 세부 계획을 세운다. 누굴 만나야 할지, 그러려면 어떤 제안서나 계약서를 준비해야 하는지, 그 다음엔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스스로 납득될 수 없다면 결코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 그렇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겨우 일을 실행시키게 된다면 유사한 방법으로 그 일을 확장한다. 그렇게 첫 목돈을 마련했을 땐 3가지 종목 중 좀 더 자금이 많이 필요한 작업의 구상에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누굴 만나야 할지, 그러려면 어떤 제안서나 계약서를 준비하면 좋을지. 그런 식으로 몇 차례를 거듭하다보면, 예상대로 성공하는 경우보단 예상치 못하게 실패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할 것이며,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지는 구간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서 나는 조금은 인간적이면서도 진실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사업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정확한 실패에 있는 것이다.


-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성공을 통해 행복해지겠다는 망상이 아니라, 정확한 실패를 통해 인간적인 성장을 겪겠다는 기획이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금이 아니라 정확한 상황파악과 두둑한 마음가짐이다. 그랬을 때만이 인생의 장르가 진정한 모험이고, 스릴러이며, SF판타지가 된다.


사업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패할 그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내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런 진로 고민은 내 삶의 의미와 직관된다. 더 이상 좋은 조건이나 나은 환경을 찾아 선택할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고, 온전히 내가 살고 싶은 삶과 죽음 이전까지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의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잊고 그저 관성에 의한 '좋은 선택'을 찾아 헤매게 될 때 분홍은 더 이상 분홍이 아니게 된다. 내가 고교를 다니며 느낀 '부자연스러움의 자연스러움'은 아마도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주어진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데서 오는 타협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며 느낀 '이전 세상과 이후 세상 간의 낙차'도 아마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닌 졸업 이후 계속해서 주어지는 더 나은 조건과 더 나을 수 있는 환경 중에 더 좋은 선택을 찾아 헤매려던 자신을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타이르려던 납득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내 안에서 타협하고 세상에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자칫 나를 나로부터 어긋나게 하는 과정은 아니었는지, 갓 스물 여덟이 반을 조금 넘어가는 시점에서 조금씩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나. 


- 잘 살고 있지 않다. 이대로 죽음이 문을 열면 나는 서러울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바라던 하루였다기 보단 내가 좇겨 들어온 골목에 가깝다. 한때 곤충을 잡고 세상의 낯선 거리들을 누비던 나는 이곳에서 숨죽이며 커지는 구멍을 덧대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구멍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 구멍을 덧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분홍이 분홍을 어길 때. 그건 결코 눈에 보이지 않아도 훤한, 아주 미묘한 차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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