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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수 Sep 06. 2021

우리가 예술을 읽는 이유

독서의 원리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나와 같지 않다. 분명히 나는 나임에도 나는 다음 순간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결코 알지 못하고, 이전의 내가 했던 선택을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나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내가 된다.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 라고 단언하며 스스로 일치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럼에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며 기실 그렇지 않은 자신과 달라지고 싶은 욕망이,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살아있는 한 계속된다. 우리는 내가 살아온 것(과거-존재)과 내가 되고 싶은 것(미래-의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평생의 시간을 쓴다. 이 둘이 아닌 우리 자신은 드물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갇혔을 때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란 없다. 이 둘 중 하나에 종속되거나 소외되었을 때 잠시 오는 자유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기표 안에 들어간 주체의 방어기제일 뿐이다. 주체가 이미 공백이기 때문에 결국엔 기표 안에 새로운 공백을 만들어낸다.  


가령, 필자는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과 편안해지고 싶은 소망이 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은 자산을 성실히 경영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인 반면, 편안해지고 싶은 소망은 자산, 경영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싶은 마음이다. 이 둘이 모두 필자의 소망일 뿐 필자 자신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이 아직 내가 아니기 때문에 오는 불안과, 아직 내가 아닌 것이 이미 서로 상충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불안이, 자유롭게 상상할수록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불안을 호출한다. 


신형철 평론가는 한겨례 컬럼(2021.05.17)에서 '리모콘을 든 폭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OTT를 통해 편하게 영화를 보며 쉬고 싶은 마음은 타인의 슬픔을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실패한다. 끝까지 본 영화는 점차 드물어지고, 채널은 계속해서 넘어가며, 우리는 자유도 행복도 아닌 것을 누리느라 지친다. "물론,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현실의 비참은 일시 정지되지 않고, 빨리 감아지지 않는다. 그냥 방치될 뿐이다." 인간의 비참(불안)은 그런 식으로 해소될 수 없다. 


단지 OTT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 유통, 서비스의 첨단화로 어려운 것이 간편해지고 있는 시대에는 인간적인 것도 여과없이 물질적인 것이 된다. 입시도 취업도, 연애도 가정도 우리는 계속해서 합리적인 것을 탐한다. 더 좋은 물건이 나오면 그전을 버리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도 그럴 유혹에 놓인다. 그것을 참는 것도 자유는 아니지만 참지 않는 것도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자유롭지 않음에도 자유롭다고 느낄 때, 불안은 불안인 줄도 모르게 방치될 뿐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불안이 불안인 줄 모르지 않고, 자유롭지 않은 걸 자유롭다고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간편한 걸 누리면서도 물질적인 것들 중에서 인간적인 것을 여과해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입시도, 취업도, 연애도, 가정도 합리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확고한 선택과 판단으로 주도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분리된 두 개의 나(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연결은 타인의 삶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타인의 삶은 물론 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총체적이거나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타인의 총체적이지 않음을 통해 자신에게 부재하는 총체성의 존재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분리를 직시하고 연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타인의 슬픔을 경험하는 강력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미적, 철학, 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니 여기엔 이중의 기획이 있는 것이다. 첫째, 타인의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과 연결할 것. 둘째, 타인의 슬픔을 통해 자신의 슬픔과 스스로 연결될 것. 이 두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경험과 이해이다. 눈, 코, 입 등 지각을 통해 경험한 대상을 말이나 글 등 인식을 통해 이해한 순간,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 한편 둘 중 하나에 실패할 경우 우리의 삶은 맹목적이거나 공허할 따름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불안의 영원한 종식과 절대적 자유를 안겨주진 않는다. 오히려 그 작업은 불안의 정지와 진정한 자유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비춘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고 자유롭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불안의 정지와 일시적 자유를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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