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1
"가끔은 슬픔도 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나간다."
이런 말을 적은 시인을 동경한 적이 있다. 그땐 슬픔이 없이 지나가는 십오 초를 또박또박 셀 수 있을 만큼 세상의 소리들이 커다랬고, 마음이 말을 앞서느라 어떤 말을 꺼내도 그 말이 참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럴 때마다 가방에서 조용히 시집을 꺼내 읽었다.
그 시인은 어떤 골목에 들어서서 그 문장을 만났을까. 우연히 그 시인과 함께 대학시절을 보냈던 한 사회학자의 강의를 한 학기 동안 수강한 적이 있다. 그 시인의 골목에 드리워 있던 그늘을 함께 봤을 그였다. 그의 눈에 비친 사회의 구조를 하얀 노트에 받아적고 있자니, 나의 골목에도 그늘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이미 세상의 소리들이 커다랗지 않고, 마음이 말의 한참 뒤에야 겨우 오는 것이 되어버렸고,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마음이라는 것에 비하면 아주 무서운 것이란 사실에 질려 버렸다. 괜찮다는 말을 오랫동안 듣지 못한 사람처럼. 삶이 쉬울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삶이 어려워질 때마다 문제가 있는 것처럼 굴게 된다.
괜찮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지 못하는 사람처럼.
#2
편안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누구를 만나도 순조롭게 대화했고, 식사도 편안했으며 잠도 잘 왔다. 그게 좋았고, 그런 선택을 계속했다.
그런 날들을 계속하던 어느 날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그런 건지 잘 몰랐기에, 괜찮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럴수록 그 기분이 더 들었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정말 편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편하다고 알고 있는 걸 여전히 하고 있는데 뭔가가 불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편했으므로 그대로 지냈다.
이젠 그 편함이 불편하다. 어떤 생각마저 드냐면, 이렇게 편할리 없고 편해선 안 되는데 싶다. 이 정도면 분명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떤 삶의 틈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 균열에 끝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걸 알아내려 글을 적기 시작했다.
#3
그런 기분 알아?
나무에 열매가 달린 것처럼
여기 저기에 추억이 다닥다닥 달려있는 거야
나무가 흔들릴까봐
바람이 부는 것도
누가 오는 것도
온힘을 다해 막고 있었지
그런데 원래 그럴 거였다는 듯
나무가 흔들렸고
열매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지
우수수수수
속상했지만 곧 지나가리라 믿었어
열매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 나무 아래서
한참을 기다렸지
얼마 남지 않는 열매마저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어
분명 한참을 기다렸는데 말이지
그래서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그건 나무가 아니었더라고
그건 추억이 아니었더라고
바닥에 우수수 시간이 떨어져 있었어
#4
저는 스물 여덟살이고요
스물 여덟 해 동안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왔고요,
그럼에도 제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뜻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저의 슬픔입니다.
이 슬픔을
당신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