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수 Sep 07. 2021

패션 : 섭씨의 자리

무언가 지나간 흔적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삶

아침에 연구실로 왔어. 비가 시원하게 내려 벌써 8월인가 했는데 달력을 보니 9월인 거야. 망연자실해졌지. 정작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그런 나 자신이었어. 어째서 8월을 나는 그저 지나쳐 갔지, 그리고 달력에  9월이라 적혔단 이유만으로 방금 나는 또 아끼는 8월을 한 번 더 지나치려 했지. 이제는 자명해졌어. 도대체 나는 왜 나에게 스며든 감정과 시간을 열렬히 맞이하지 못하는 걸까. 예민하게 굴기 보단 불행함이 컸어. 가느다란 차이로 인해 행불을 결정되어지도록 한 나 자신이. 




무언가로 나를 바꿔야 할 때

무언가 결정되어지고 있다는 건 그것이 계속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내가 온전히 손을 떼고 있는 것. 어쩔 수 없는 건 정말로 어쩔 수 없다 싶어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행위. 그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그 일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은 언젠가 내게 바라는 어딘가로 나를 데려다줄까.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음으로써, 내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줄 것이란 환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그것을 견뎌내고 있다 믿는 건 아닌지. 이 핫하지도 쿨하지도 못한 미지근한 삶의 온도. 




무언가로 내가 바뀔 때

이런 날들도 있었지. 편지를 받듯 어느날 퐁당 마음이 도착한 거야. 누군가 나에게 말로 건넨 그런 인스턴트식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와버린 바람에 직접 겪었던 일련의 시간들이 끝이 나고, 이미 모든 것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서서히 도착하기 시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점차 안으로 들어오면 질량이 달라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하고, 손과 이마에선 잠시 미열이 일기 시작하고, 나는 마치 무언가 두고 온 것이 있는 사람처럼, 설령 아주 잠시일지라도 그 자리를, 쿨하게 떠나 그 앞을 향해 뜨겁게 나아가게 되는 거야.  




패션 : 섭씨의 자리 

그러한 상속의 경험. 그들이 나에게 남겨준 것. 무언가 지나가고 없어진 자리에 여전히 그 무언가가 부재함으로서 남아있는 흔적, 온기, 잔상 같은 것. 이젠 그 자리에 없음으로써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들을 끊임없이 야기시키는 열에 의해 미지근했던 삶은 다시금 뜨겁게 달궈지고, 누군가는 또 다른 잔상이 되어 어딘가를 향해 쏘아나간다. 그렇게 누군가의 삶에, 표정에, 눈빛에, 입가에 붙은 가속도, 그 자리에 있으나 그 자리를 벗어난, 색보다 강하고 빛보다 진한 흔적. 그 섭씨의 자리를 패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작가의 이전글 슬픔이 지나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