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적으로는 돈 때문이었다. 이미 3만 원을 지불했다. 매표소에서도 그랬고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곳곳에 ‘주의: 환불 불가’라는 팻말이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로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뛰어내려야 했다. 북한강과 남이섬이 내려다보이는 55m 높이의 이곳에서.
나는 내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가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뱃속이 팽팽해지는 불안감을 느끼곤 했으며 중학교 시절 감자튀김을 사주겠다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자이로드롭을 탔을 때 죽도록 후회한 바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번지점프행을 택했는가. 그건 오로지 스스로 정한 원칙 때문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면 해볼 것. ‘아는 대로 행동하라’와 더불어 나에게 정해준 삶의 지침이었다.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며 글을 쓰고 있자니 속이 안 좋다. 당시에는 더 심했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송전탑 느낌의 철제 구조물을 걸어 올라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이미 답이 나왔다는 생각에 다 때려치우고 1층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치밀었으나 그럴 때마다 애써 3만 원을 떠올렸다. 지금도 (내 기준에서는) 꽤나 큰 금액인 3만 원은 20대 초반이던 당시 훨씬 더 거액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탑 꼭대기에 올라가 주섬주섬 장비를 착용하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행복이 중요한 거 아니었나. 왜 자처해서 돈까지 내고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됐다. 하지만 이미 줄이며 보호대를 착용한 상황에서 그만두겠다고 말하기에는 사회인으로서의 체면이나 안전요원을 고생시켰다는 점에서 곤란했다. 이제 와 못하겠다며 난리를 피워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과 직원의 짜증을 돋우는 진상이 될 수는 없었으므로 좌절감을 애써 숨긴 채 난간을 놓고 뛰어내렸다.
허공에 존재한다는 것. 나를 붙잡아주는 그 어떤 것도 없이 공중에서 오로지 중력하고만 대면하는 감각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예상 밖의 쾌감이라거나 해방감은 없었다. 바이킹을 탔을 때 느끼던 뱃속 뒤틀림을 또렷하게 느끼며 다짐했다. 혹시 자살할 일이 생긴다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선택지에서 빼야겠다고. 앞으로 번지 점프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게 그날의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모든 일은 한 번쯤 시도해 볼 것. 중고등 시절 정했던 이 규칙 덕에 내 인생은... 꽤나 풍요로워지고 있다. 시도, 경험이라는 말이 들어있어 훈훈한 결과를 가져올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번지 점프가 대표적인 예시다(작년에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국경에서 번지점프를 할 기회가 있었으나 한 톨의 미련도 없이 거절했다). 작년의 경우 직장 동료의 꼬드김으로 AI 동화책 쓰기에 참여했다. 동화책과 글쓰기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시작했지만 내가 상상한 종류의 작업은 얼마 되지 않았고, 변화하는 세상에 내가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체감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행복한 결말도 있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큰맘 먹고 입에 넣었던 두리안은 느끼하면서도 달큰한 특유의 맛으로 즐거움을 줬다.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연극부는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중이다. 한 번쯤은 외국에 살아봐야겠다는 마음 가짐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4년생이신 포레스트 검프 선생님께서는 진즉에 나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으셨고, 나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분이기에 내가 앞서 긴 글로 늘어놓은 말을 다음의 간결한 비유로 표현하신 바 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뭘 고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태어났기에 기왕 선물 받은 초콜릿이라면 어떤 맛이든 한 번쯤은 경험해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코딱지 맛을 먹고 기분이 나빠졌다면 빨리 다음 포장을 뜯어서 헤이즐넛의 고소함을 즐겨보는 거다. 꽝일지 당첨일지는 일단 뛰어내려 봐야만 안다.
아무튼, 번지점프다.
*혹시 초콜릿 알레르기가 있거나 초콜릿이라면 뭐든 싫은 사람에게는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