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왼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뺨도 내어주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물론 누군가 나를 때린다면 경찰에 바로 신고하겠지만 그 말의 의미에는 공감한다. 칼같이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타인에게 인정을 베푸는 따뜻한 사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유토피아를 만드는 데에 일조하는 구성원이 되고 싶었다. 마음은 분명 그랬다.
고등학생 수백 명이 옆에서 요란한 유행가와 함께 소리를 질러댄다. 나와의 거리가 100m도 되지 않으니 카페 옆자리 사람들이 생난리를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무실 벽이 음악에 맞춰 둥둥 울리고 변성기가 지난 아이들은 맞지도 않는 음으로 악을 쓴다. 지난번에는 사물놀이부가 와서 꽹과리를 쳐댔고 지지난번에는 밴드부가 제목 모를 락 음악을 연주해 댔다. 내 직업이 음악 평론가 또는 아마추어 예술가 스카우터였다면 필요한 시간이겠지만 나는 교사다. 북새통 속에서 공문을 기안하고 수행평가를 채점해야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도무지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지만 스스로를 다그친다. 정신 차려, 프로라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야. 집중하려고 애를 쓰다가 선언한다. 젠장, 난 아마추어야.
이 상황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학교 시설의 열악함이 문제다. 체육관 창고를 개량해 만든 교무실은 에어컨도 창문도 없다. 방음 시설도 당연히 없다. 학생들이 옆의 벽에다 대고 배구 스파이크 연습을 하면 그대로 울리는데, 그 소리는 일에 몰두하려 노력하는 나까지도 울렸다. 그래도 그럴 수야 있는 거다. 교실 한가운데 똥을 싸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만 화장실 변기에 싸면 (물까지 잘 내린다는 가정 하에) 교양 있는 지성인이다. 체육관 벽에 공을 던지는 학생은 죄가 없다.
조금 더 보수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어쨌든 앉아 있을 교무실이 있으면 감사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울지 마 톤즈’의 배경인 남수단에서 일했으면 사무실이라고 이름 붙일 방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상상을 더해가다 보니 그럭저럭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다. 이것이 꼰대 사고방식의 쓸모다.
그렇다. 만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바퀴벌레도 그렇다.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아마도 각종 동아리 연습이며 행사를 내 교무실 옆에서 하게 된 것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따른 결과로 보인다. 공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쨌든 누군가는 피해를 보아야 한다면 약 120여 명의 교직원 중 초등 체육 교사 2명이 괴로움을 몰아서 가져가는 편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꾀할 수 있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날도 벤담주의자의 결정에 의해 팔자에 없는 어린양 역할을 맡고 있었다.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도담관에 모두 모여 축제를 즐겼다. 불행한 건 오직 나뿐인 듯했다. 중고등학생은 교무실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문 정도는 산뜻하게 무시하고 교무실 옆 쪽문으로 지나다녔다. 끊임없는 방해와 원치 않는 시선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신경질적으로 연 책상 두 번째 서랍에서 바퀴벌레가 튀어나왔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전에도 바퀴벌레의 출몰은 있었다. 하지만 그 바퀴벌레 가족은 3개월 전에 분명 내 손으로 박멸했었다… 게다가 기존의 바퀴벌레들은 문을 열면 도망가기에 바빴지 이렇게 마술사의 서랍 속 비둘기처럼 자신감 넘치게 등장하지 않았다.
그 바퀴가 가족들의 복수를 하러 온 일가친척인지는 몰라도 나는 절박했다. 지금 잡아서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서랍을 열 때마다 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책상 아래로 숨어든 바퀴벌레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서랍을 들어서 옮기고 슬리퍼로 방구석 이곳저곳을 내리쳤다.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작업을 끝냈을 때 깨달았다. 방금 누군가를 향한 야속함이나 분노 없이 오롯이 바퀴벌레에게만 집중하는 멋진 시간을 보냈구나. 자꾸 잡생각이 밀려드십니까? 바퀴벌레를 방 안에 풀어보십시오. 이것이 바퀴벌레의 쓸모다.
앞서 말했듯 나는 예수 정신 추종자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체육관 수업을 빼앗기는 일이다. 중등에서는 행사가 있다며 종종 양해인 척하는 선포를 하고는 체육관을 가져갔다. 예전부터 그래왔다는데 나 혼자 별나고 싶지 않아 ‘네~’하고 대답하지만 속은 분노로 들끓곤 했다. 애들이 체육관에서 뛰어노는 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데! 바자회는 축구장에 천막을 치고 하면 될 텐데! 학생회 선발 토론은 방송 송출로 내보내고 일부 학생들만 콘서트홀에 가서 참여하면 될 텐데!
암울한 현실에 사로잡히면 괴로워지는 건 나다. 물론 나의 감정을 이해는 한다. 내 권리를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다. 수업 진도가 뒤틀리고, 에너지 분출을 못해 좀이 쑤셔하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집착해 속이 타들어가는 건 내가 선택한 업보다. 그러니까 넘어가야 한다.
마음을 흘려보내기 위해 리코더를 집어든다. 명상보다는 난이도가 있어 생각을 한데 모을 수 있으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은 행위, 그게 리코더 연주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리코더를 분다. 레솔시 레~ 도시라시. ‘인생의 회전목마’가 도시 야경을 배경 삼아 울려 퍼진다. 어떻게 불어도 소리가 나니 이만한 위안이 없다.
만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수록곡인 ‘인생의 회전목마는 나름의 인연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오케스트라에서 솔로 파트를 맡아 연주한 바 있으며 고등학교 시절 수행평가 지정곡이었다. 친구들과 나는 리코더를 굉장히 열심히 연습했다. 석식을 먹고 나면 운동장에 나와 리코더를 삑삑 불어댔다(그쪽 교무실에서 일하던 누군가는 짜증 났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근데 우리 이거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솔직히 어른 되면 안 할 거잖아.”
수진의 질문에 우리는 키득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커서 쓸 일도 없는데 달의 공전은 왜 배우고 계산기가 있는데 원의 넓이는 왜 구한단 말인가. 우리는 의미도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하루 종일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걸까. 사실이라면 너무 비극이었다. 그날의 대화는 엽기떡볶이를 시켜 먹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원래 고등학생의 심오한 고민은 단순하게 끝이 나는 법이다.
리코더를 불며 수진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수진아, 난 삼십이 다 되어서도 계속 리코더 분다. 너도 짜증 나는 일 있으면 리코더 불어봐. 의외로 손이 기억하고 있다니까.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더블텅잉을 열심히 하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교실에 봉인당해 씁쓸한 체육을 한 경험도 학생들에게 쓸모가 있을까? 암, 그렇고 말고. 바퀴벌레도 쓸모가 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