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영화를 같이 보는 ‘선생님’이 계시다.
이제 세상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남발되어 자제하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본 의미, ‘인생이나 학문, 경험에서 나보다 앞서 살아온 사람, 더 많이 아는 사람’과 ‘인격과 지식 면에서 존경할 만한 존재’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선생님’은 나보다 열 두해 선배이다.
선생님과 가까워진 건 먼저 알고 지낸 동갑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한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 구청에서 진행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당시 아버지도 돌아가신 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제대로 돈 벌이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집에서 고통에만 매여 있을 수가 없었다.
몰두할 일이 필요했는데 마침 이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픈 상황이었다. 그저 참석만 할뿐 활동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런 나에게 동갑내기는 먼저 말을 걸어 주었고 선생님도 소개시켜 주었다. 동갑내기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동갑내기는 작은 모임을 주도했고 그 모임으로 인해 선생님과 자주 이야기 나누게 되었는데, 마음이 매우 우아하신 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로 영화코드가 맞는 걸 알게 됐다.
그 후로 우리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미 십년 전에 나는 그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지만, 우리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영화를 보고난 감상은 서로 달랐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신선하고 좋았다. 선생님은 먹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선생님께는 아쉬운 부분인 줄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참 잘 들어 주셨다. 그리고 칭찬도 많이 해주셨고 많이 안쓰러워 해 주시기도 했다. 늘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도 잊지 앉으셨다. 솔직히 말하면 세례도 받은 내가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것을 언제나 참아 주시고 들어 주시는 대모 같은 분이셨다. 때로는 자식들과의 갈등문제도 내 놓고 나의 의견을 물으시기도 하셨다. 생각해 보면 어느 누구보다도 나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신 분이다.
선생님이 나와 동문이라는 사실을 안지는 고작 2,3년 됐을까. 우리의 우정이 십년이 하고도 수년이 더 되는 세월인데 말이다. 게다가 선생님은 내가 동문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그 선생님의 멋짐이 더 폭발하는 순간이다. 물론 나도 어디 가서 출신대학을 말한 적은 없다. 어쩌다 동문을 만나더라도 ‘나도 동문입니다’ 라고 한 적도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지 않았는가.
선생님은 젊은 시절 동요로 ‘어린이 문학의 노벨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도 받으신 분이다. 그 사실도 얼마 전에야 우연히 알았다. 선생님은 끊임없이 봉사와 일을 놓지 않으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코딩‘을 배우고 계신다고 하셨다. 국가 공인 자격증이 없는 분야였지만 1급을 따야 한다며 얼마나 열심히 하시고 자격증을 못 땄다고 또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셨는지 모른다. 결국 나도 코딩을 하게 됐다.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덕분에 나도 디지털 세계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올해부터 일이 안 들어온다고 서운해 하셨다. 나는 오히려 그동안 꾸준히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았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너무 부러운 삶을 사셨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오늘 선생님께서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만나자고 하셨다. (아, 선생님은 이제 나의 동네로 이사 오셨다.)
비가 왔다. 저 멀리 우산을 들고 계신 선생님이 보인다. 생긋하고 웃으셨다.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이후로 낯빛이 아주 좋아졌다는 소리를 자주 들으신 단다. 서울보다 우리 동네가 공기가 좋기는 하다.
“나 이번 달 말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가요."
놀라웠다.
그동안 고민하셨던 일을 과감히 밀고 나가려 하시는 모양이었다. 혼자 가시는 거였다. 그 연세에 어학연수를 가는 분은 처음이라고 어학연수 유학원에서도 놀랐다고 한다. 늘 영어를 잘 해 보는 게 소원이셨단다. 그리고 그 영어를 활용할 꿈을 가지고 계셨다.
정말 멋진 분이다. 이렇게 내 인생에 귀감이 되는 분을 ‘선생님’ 말고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
요즘 ‘선생님’이 너무 범용적으로 쓰이다 보니 무색무취해졌다고들 한다.
고객 기만용으로 쓰이는 ‘선생님’ 호칭이 진정성 없다는 비판도 있다.
문득, 내가 아무렇지 않게 불러드렸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과연 이분께 걸맞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진심 어린 존경의 마음을 담으면서도 세상에 흔해져 버리지 않은, 그런 숨은 호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