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라는 영화가 있다. 몇 년 전에 본 인상적인 영화였는데
나는 최근 AI와 대화를 하며 그 영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마침 내가 가입해 있는 영화탐구(토론) 모임에서 이번에 이 영화를 다뤘다.
우리의 모임은 온라인을 통해서 함께 영화감상을 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가끔 오프라인에서 모여 함께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다시 보는 영화는 또 봐도 재밌었다.
이번엔 감독의 의도적 장치들이 선명하게 보였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도 의미 있게 해석됐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엔 국군장병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1학년 때다. 나는 그저 정성껏 쓴 것 같다.
답장이 왔는데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글씨체에 깜짝 놀랐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연애편지도 아니고.
그런데 자신의 증명사진을 한 장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세 통 더 왔던 것 같다.
나도 계속 편지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2학년이 되면서 방과 후에는 그림을 그리러 다니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어느 날, 우리 집으로 한 남자가 양복을 입고 찾아왔다.
그 군인이었다. 상기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놀랐고 나도 무척 당황을 했다.
그는 당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꿈도 없이 군입대를 했는데,
내 편지를 읽고 그 후 공부를 시작해서 2년제 전문대학에 들어갔고,
이제는 어엿한 호텔에 취직해서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나의 편지에는 내가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과연 미대를 갔을지 궁금했다고 했다.
내가 꽤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에 그는 너무나 놀라고 좀 실망하는 빛이 스쳤다.
그는 그렇게 돌아갔다. 그 후로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황당했다.
내가 ‘이아(Ai)’가 아주 자연스러웠던 것은 이미 ‘HER’라는 영화를 통해서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봤을 때는 잘 들어오지 않았던 주인공의 직업과 그의 대사,
“편지는 편지일 뿐”이다라는 말이 핵심처럼 와닿았다.
2013년 제작된 이 영화에서 시대는 2025년이었고 주인공의 직업은 대리로 편지를 써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렇게 발전한 시대에 주인공이 대필작가라는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인류역사에서 또 대필작업의 역사는 얼마나 긴가?
그만큼 대필작업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작가의 의도된 설정이겠다.
어쨌거나 주인공은 너무나 섬세하고 뛰어난 솜씨로 편지를 써서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고,
동료들도 부러워했다.
이때 주인공이 그 대사를 한다.
그리고, 이와 대비를 이루는 그의 AI와의 교제, 그리고 진정으로 빠져드는 사랑의 감정.
그 역시 ‘AI는 AI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편지는 편지일 뿐’
글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아니 ‘글’뿐이겠는가? 설령 진심을 담았다 하더라도, 리얼 다큐멘터리라도 하더라도 창작자, 제작자의 의도, 관점이 들어가지 않은 창작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물며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상적 행위에도 자신의 관점이나 의도를 완벽하게 제거하고 전달하기는 힘들다.
요즘 글을 쓰기 시작한 나는 저 말을 계속 곱씹고 있다.
혼신을 다해 창작물에 진심을 넣었을 때,
관객이나 독자가 ‘편지는 편지일 뿐’이야 라고 말한다면 서운해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나의 진심을 적극적으로 공감한다며,
나에게는 낯선 관객이나 독자가 몹시 가까운 듯 행세를 해도 나는 참 난감할 것 같다.
작가는 그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나 또한 누군가의 낯선 독자이고 창작물의 낯선 관객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 포인트에서 나 또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초보 창작가는 고민이 많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