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조용한 단지

by 오로라

몇 해 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마주친 택배기사가 문득 말을 걸었다.

“이쪽 지역 담당인데요, 이렇게 조용한 단지는 처음이에요.”

그러곤 나의 반응을 기다릴 틈도 없이 바삐 사라졌다.

뭐지? 왜 나에게? 처음엔 헛웃음이 났지만 이내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서 좋다’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이렇게까지 얌전하면 단지가 발전하고 있긴 한 건가?’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나는 첫 번째 해석을 택했다. 나는 나의 노후를 보낼 생각으로 이사 왔는데,

와서 살아보니 사람들이 순하니 좋았다.

하지만 부녀회나 이웃들 중에는 이 말을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얌전해서 ‘우는 아이 젖’을 못 얻어먹고 있으며,

그 피해는 집값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엔 동네 문제로 이만 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지만, 결국 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단지는 주민들이 현장에 가서 집단으로 드러누웠고, 그 덕에 계획이 바뀌었다고 했다. 어떤 이는 홀로 엄청난 수의 서명을 받아 관철시켰다고 했다. 우리도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지만 결국 허사였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한 거지? 정말 그런 식으로 정책이 바뀐 건 사실일까? 우리는 무엇을 놓쳤을까.


그런데 나는 그냥 우리 동네가 좋다.

특히 우리 동네 부녀회는 이제 이 지역 거의 모든 단지에서 부러워하는 단체이다.

그 안엔 그동안 회장을 맡아 오신 분들의 성품이 한자리 한다.

그 분들의 조용한 봉사는 점점 커다란 울림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단지에서도 우리 단지처럼 부녀회를 활성화 하고 싶어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녀회와 연결되어 들어오는 직거래 식자재도 상품이 최상이고 가격도 좋다.

특히 사과는 다른 지역에 사는 나의 언니 동생들에게도 주문받을 정도고, 잠깐 판매된 적이 있었던,

우리 주민 친정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깨강정의 맛은 우리 자매들 모두 잊지 못한다.

동생은 언제 또 판매되는지 나에게 예약까지 걸어 놓은 상태다.


이웃 간의 따뜻한 나눔도 흔하다. 나도 가끔 나눔을 올리는데,

공짜로 준다 해도 꼭 무언가를 한 꾸러미 두고 가는 분들이 있다.

덕분에 삶의 온기가 퍼진다.


몇 년 전, 전세로 이사 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새댁이 우리 동네의 시설물에 대해서 비아냥 거리는 글을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아무도 답글을 달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사 갔는지 모르겠다. 그 시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아무런 불만 없이 잘 사용되고 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나는 밤마다 들리던 개구리 울음 소리를 잊지 못한다.

단지 안 연못에서 울어대는 개구리는 마치 시골에 피서 온 기분을 주었다.

별이 쏟아지는 깊은 밤에 깔끔한 평상에 누워 있는 그 평온함. 잠이 잘 오는 건 물론이고 행복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그런데, 다시 몇 년 전, 엄마는 우리 라인으로 이사 온 젊은 사람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다.
“이사 오니 어때요? 우리 동네 괜찮아요?”

“밤새 개구리 소리에 잠을 못자요.”

세상에! 누군가에게는 그 정겨운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그저 소음이었던 것이다. 하하


요즘은 창을 열면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한참 울어대는 새소리는 또 얼마나 예쁜가.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또 믿기지 않을 만큼 신기하게 여겨지는 맛있는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 내가 신기하다고 하는 이유는 요즘 같은 주방구조에서 어떻게 음식냄새가 창을 타고 들어 오냐는 것이다. 집안에 냄새 배지 말라고 발코니 같은 곳에다 가열도구를 놓은 집일까. 생각해 보니 이제는 그 냄새를 맡지 않은 지도 오래된 것 같다. 하지만 아주 가끔 하늘에 노을이 예쁘게 물들 때 풍겨 오던 파스타 냄새며, 고기 굽은 냄새 등은 내가 갖지 않은 일상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물론 온라인 소통창구엔 민원 글도 오르내리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겸손하게 인사를 나눈다. 지금은 똑똑한 젊은 직장인 주부가 우리 단지 회장을 맡고 있는데, 그녀 덕분에 단지 분위기는 더 세련되어지고 활기차다. 이번 지역 단지 총연합회는 우리 단지 작은 도서관에 서 진행되었다. 나도 회의에 참관했는데, 시장과 공무원들, 주민들 모두 열심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란다. 우리 단지도 언젠가는 내 취향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앞선 자가 뒤로 가고, 뒤선 자가 앞서게 된다’는 말도 있듯이 나의 ‘결’과는 다르게 우리 단지가 이 동네에서 제일 살고 싶은 단지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집이 좋고, 이 단지가 좋고, 동네 사람들이 좋다.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는 내 집, 넉넉한 공간들. 어제 만난 친구가 방문했던 비싼 동네의 90억짜리의 집은 구조가 너무 좁고 복잡해서 생활하기에 별로 좋아 보이지 않더란다.

"하지만 90억이잖아. 하하."
"그렇군, 하하"

‘우리 단지’ 하면 떠오르는 건, 개구리 울음소리, 창문 너머 솔솔 부는 꽃향기, 예쁜 새소리,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가끔 날아들던 저녁 밥 짓는 냄새다. 그건 아빠 퇴근을 기다리며 부엌의 엄마를 지켜보던 행복한 어린 나를 소환해줬다.


이제는 그것 또한 추억이 되었지만, 사람은 결국 그 추억의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 모든 시간들도 그저 물처럼 흘러가리라.


어제도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 단지는 꽃향기로 가득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는 얼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사 오셨어요? 못 뵙던 분 같네요.”

“네,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잘 오셨어요. 우리 동네 어떤가요?”

“너무 좋아요.”

“혹시 밤에 개구리 소리는...”

“너무 좋아요. 저는 옆 단지에서 이사 왔어요.”

“아, 이미 알고 오셨구나. 하하.”


개구리 소리를 힘들어했던 그분은, 이사를 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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