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상식의 힘

by 오로라

“차 샀어요, 빨간색 OOO요.”

“어머! 안 돼요.”

일적으로 알고 지내는 한 여자 사장님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이유인즉, 그녀도 몇 년 전 작고 빨간 차를 샀는데, 그 차를 몰고 다닐 때 도로 위에서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뒤차가 마구 클락션을 울려대고, 깜빡이도 켜지 않고 함부로 끼어들기 일쑤였단다. 운전하기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차를 바꾸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남편은 “당신이 운전 미숙인 거 아니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차가 고장이 나 그녀의 차를 타고 외출했던 남편이 얼굴이 시뻘게져 돌아왔다.

“당신 차, 당장 바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심 겁이 났다. 초보 운전자는 아니지만 길치에다 운전을 썩 좋아하지도, 뛰어난 실력도 아닌 내가 빨간 차를 몰면… 나 역시 그런 무시를 당하게 될까? 실제로 나도 종종 끼어들기를 못해 뒤차의 경적 소리를 듣곤 했으니까.


걱정은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나의 불안한 파장이 우주에 닿았던 걸까?


놀랍게도, 정작 운전을 시작하자 전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차량들이 나를 배려해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이전까지 탔던 회사차는 아이보리색 중형 고급 세단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작은 이 빨간 차가 더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 차는 @사의 유럽 전략형 소형 해치백으로, 유럽 감성이 묻어나는 세련된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실시간 정보가 넘쳐나지 않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외제차로 착각하고 조심스럽게 대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또래의 누군가와 얘기해 보면 ‘옛날이 더 좋았다 ‘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은 참 많은 편견에서 벗어나고 있다. 빨간색이 마치 여성의 전유물인양 여겨졌던 세상이었다. 남자의 일 따로 있었고 여자의 일이 따로 있었던 시절이었다. 운전하는 여자들에게 어떤 남자들은 무차별적으로 거침없이 욕을 해 댔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차 뒷 유리창에 “설거지, 청소, 빨래 다 하고 나왔습니다.”라고 쓰고 다닌 차가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나의 멋진 친구는 평생 남편이 살림을 하고 내 친구가 바깥일을 했다. 친정에서는 박사학위까지 있는 남자가 살림만 하니 못마땅해했지만 더 똑 부러지는 내 친구는 그런 친정과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온몸으로 막으며 정말 열심히 서로를 존중하며 잘 살아냈다. 요즘 시대도 아니고 그 온갖 편견이 난무하는 시절에 얼마나 용감해야 했고 또 얼마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애먼 데에 쏟아야 했을까.


나는 요즘 시절이 더 좋다. 나 같은 길치는 내비게이션이 없던 그 시절 지도책을 옆에 끼고도 모자라 출발하기 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도착할 장소까지 시뮬레이션을 하는지 모른다. 긴장은 최고조다. 그 시절 나는 집을 못 찾아가기도 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머리는 하얗게 되고 잘못 들어선 시작지점으로 도로 찾아 간 다음, 집으로 가는 길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몇 년 전, 언니가 주차장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옆에 빨간색 작은 차가 있었거든? 그런데 거기서 덩치가 산만한 남자 네 명이 꾸역꾸역 나오는 거야. 내 차랑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대조가 되면서 너무 웃겼어.”

나도 웃었다.


편견은 여전히 우리 일상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게 상식인 듯.

하지만 상식도 ‘오래된 편견’이라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에도 취향을 살리겠노라 새 차로 작은 차를 고른, 사회적으로 중역에 있는 중년남자가 주변의 '상식'이라는 조언에 결국 한 달 만에 중형차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하지만 나 또한 도로에서 위협을 받은 적도 거의 없다.


그래서 내 차는 여전히 작고, 여전히 빨갛고, 여전히 예쁘다.

나이는 이미 고령이지만 자주 쓰지 않아서 단골 카센터에 의하면 아직도 꽤 쓸 만하단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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