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등산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산속에 있는 걸 좋아한다. 산속에 있으려면 산을 오르내려야 한다.
등산을 시작한 지 20년은 족히 넘었는데 이제야 나는 그게 좀 수월하게 다닌다.
그만큼 나는 소질도 없고 요령도 몰랐다. 나에게 산행은 고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암벽도 했다. 고소공포증도 있는데 말이다.
당시 나는 산이 너무 좋아서 산에서 하는 일이면 뭐든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말이 돼? “
고소공포증도 정도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심한 사람들처럼 기절하거나 정신을 잃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내 몸을 누군가가 절벽 아래로 끌어당기는 무서운 기분을 느끼는 거기까지.
이제 생각해 보면 그런 나를 함께 데려가 주고 성취감을 맛보게 해 준 사람들에게 백배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제 암벽을 안 한 지 15년쯤 된다. 작년, 문득 다시 암벽을 하고 싶었다.
아름아름 암벽을 하는 사람들과 다시 연이 닿았다. 하긴 했는데 다치고 말았다.
다시 마음은 쪼그라들었고 그렇게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암벽 얘기를 하는데 또 마음이 스멀스멀 설레는 거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다시 초보자 교육을 받는데 나는 하루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동안 괜찮아졌을 줄 알았던 고소공포증은 처음처럼 심했고
절벽처럼 서 있는 암벽도 처음처럼 무섭고 낯설었다.
“잘 관뒀어. 그런 걸 왜 하는지 몰라.”
“언니는 매번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서 왜 산에 오는데요?
”매번 등산은 너무 힘든데 집에 가면 너무 좋아서 다시 오고 싶은 거야. “
“언니, 암벽은 그 기분의 100배쯤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도 너무 위험하잖아, 그런 사소한 데에 목숨을 걸어?”
“언니, 나 암벽 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손끝하나 안 다쳤어요. 방심하는 마음이 문제지요.
그리고 언니는 비행기 탈 때 죽을 각오 안 하세요?
나는 비행기 탈 때도 매번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해요,”
지난달 함께 북한산을 다녀온 선배 언니와의 대화다.
25여 년 전, 운 좋게 등산 고수님이 계신 팀에 막내로 들어가 암벽등반의 맛을 봤다.
세월이 흘러 다시 이렇게 암벽에 붙어 보기 전까지는
그때의 내가 그렇게 큰 애물단지였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암벽에 붙어서야 옛날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무섭다고 소리치고 고수들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울부짖기나 하고,
어느 때는 미친 듯이 빨리 숨은벽을 기어 올라가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는데,
나의 심정은 그저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도 모르게 초인적으로 그렇게 된 거였다.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 모든 사항을 지적받았지만 나는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암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암벽도 해봤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손끝하나 안 다치고 암벽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 팀의 나를 위한 많은 배려가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이번에 다시 암벽에 붙었을 때 나는 누구에게도 이쁘게 봐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그저 중년의 민폐덩어리일 뿐이었다.
중고 판매 사이트에 암벽화를 내놓았다. 여러 사람이 구매 의사를 밝혀서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암벽을 즐기는 사람이 많구나. 그중 맨 먼저 찜한 사람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좋은 취미를 왜 더 이상 안 하려고 하느냐고.
자기는 70대에도 암벽에 오르는 선배님들을 보며 그런 멋진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내가 구매를 철회할 테니 계속하시라고.
하지만 나는 관악산의 육봉, 팔봉, 북한산의 의상능선 정도의 바위만 안아도 좋다.
바위에는 정말 오묘한 기운이 있다. 실컷 바위들을 만나고 집에 오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돌에서 원적외선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여인들이 보석을 좋아하는 이유도 보석에 어떤 기운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아주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공명이었을까. 한 달 전, 15년 전의 그 고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번 모이자고.
그리고 지난 토요일 고수님과 시간이 되는 다른 동지와 함께 관악산을 살방살방 다녀왔다.
올해로 78세가 되시는 고수님은 한창시절에는 인수봉 암벽에서
동사한 시체를 매고 내려오신 이력이 있으신 분이다.
체구도 아주 작으신데 체육계통으로는 천재이시다.
“내 컨디션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지 도대체 몰라요, 못 믿어요. 판단이 안 서요. 그래서 운동치 인 거예요.”
나와 다른 동지는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그 시절 나만 민폐가 아니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하
다른 동지와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운이 참 좋았음을 회고했다.
그리고 버리지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주지 못하고 있는 서로의 암벽장비들의 안부를 묻고 웃었다.
다시 할 수 있을까?
(사진은 1년 전, 14년 만에 처음 얼떨결에 암벽을 오르내린 모습. 결국 나는 살짝 다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