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이해
선악의 개념은 개인이나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 주관성이 포함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악(惡)의 개념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대부분 선(善)의 반대어로 '도덕적으로 나쁘고 옳지 않은 것 또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로 정의한다.
선악에 대한 결과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성경 속 이야기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선악과 죄라고 일컫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먼저 기독교에선 선악 구분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이 선의 근원이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선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는 삶이며, 악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의 기준처럼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상대방과 비교하여 선악을 정의하거나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악이다. 말과 행동, 생각, 마음 등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체의 것을 악으로 여긴다. 여기서 죄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사건이 원죄의 시작이다.
원죄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기를 닮은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그들을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고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 나무를 두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사람에게 알려주었으나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큼은 절대 먹지 말라고 했다. 먹는 날이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사전에 일러 주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6~17절)
최초의 부부로 살게 된 아담과 하와는 그 동산에 머물며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동물 중 교활한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여기에 함정이 있다. '모든'과 '정말'인지라는 말을 넣어 여자를 미혹했다.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했지만 뱀이 임의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한 탓에 자기 생각으로 결정한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결론에 이르러 신이 정한 질서를 흐트러뜨리려는 뱀의 작전에 넘어간 것이다. 뱀은 그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두 가지 거짓말이 숨겨져 있다. 죽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장 4절)
이 말은 사람에게 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잘못된 정보를 듣고 여자는 판단했다. 뱀의 말이 이상했다면 즉시 하나님께 물어봐도 좋았을 것을. 이후 여자는 뱀의 말에 미혹되어 그 나무를 보았다. 견물생심으로 손이 간 것이다. 그녀의 독백을 들으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아름다워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라고 할 정도니 유혹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자기가 먼저 먹고 최초의 사람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었다. 죄는 이처럼 퍼지는 습성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났다. 분명 하나님은 이유가 있어서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새기지 못한 탓에 그 둘은 거스르고 말았다. 두 사람은 뱀의 말대로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서로 벌거벗은 몸을 본 뒤 생긴 변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던 이전의 자유롭던 둘의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 원죄로 인해 부자유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밝아진 눈 때문에 보지 않아도 되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에 숨을 정도로. 부부 사이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가 시작된다.
인류는 아담 이후 원죄라는 불순종의 시대를 살아간다. 죄를 짓고 나서 생기는 부끄러움의 시작이 이때부터였을까? '양심의 가책'이란 표현이 있다. 죄로 인해 찔리는 마음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죄를 범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신다. 악을 행한 남자에게 하나님이 먼저 이유를 물으셨다. 그러자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미루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셋 모두에게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다. 뱀에게는 배로 기어 다니고 죽을 때까지 흙을 먹고 여자와 원수가 되게 했다. 여자에겐 임신과 고통으로 자식을 낳게 될 것이라고 했으며, 남자는 평생 수고해야만 땅의 생산물을 먹게 될 것이라며 노동을 명했다. 두 사람은 이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나님은 천사를 배치하여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해 다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선악을 분별하고 생명을 주관하는 일은 오직 창조주 밖에 할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추방당한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처럼 노동하고 하와는 출산의 고통 속에 살았다. 하지만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을 선물로 주셨다. 새로운 인류로 부모자녀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죄를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선악의 구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의 질서를 만드신 분이다. 당연히, 선악과 생명까지 주관하신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구별 짓고 사람이 지키도록 에덴동산에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교활한 뱀처럼 미혹의 영 앞에선 무너지고 약해지는 사람의 모습도 기억해야 한다. 창조의 본질을 잘 모르는 사람은 뱀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애초 그런 뱀은 창조하지 않았다면 원죄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주종관계처럼 지내길 원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다. 즉, 금지되는 행동을 알려준 것은 창조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딱 맞는 예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해 보자. 만약,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고 생각해 보라.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면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높은 곳, 깊은 곳처럼 위험한 곳은 피하라고 한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미리 전하고 반드시 지키라고 당부할 것이다. 왜 그런가? 보호자 역할 때문이다. 자녀를 궁지에 몰기 위함이 아니다. 마치 뱀처럼 미혹하는 환경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뱀을 교활하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 간사하고 꾀가 많은 뱀은 얕은수를 써서 여자부터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게 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속셈이 교활함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부합하는 것이 악이므로 뱀은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해 악의 길에 빠지게 했다.
간혹 일부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게 하려면 그 나무 역시 아예 없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세운 질서를 사람이 자기 의지로 바꾸려는 것이다. 마치 표식이나 경계석처럼.
인간관계에서도 경계가 없는 사람은 오히려 불편하지 않는가? 가깝다고 내 집에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오는 친구가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상호 존중에서 시작된다. 한 여름, 해수욕장에 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수영이나 파도타기처럼 신나게 놀 수 있는 구역과 그렇지 않은 곳을 부표로 설치해 둔다. 해안선에 가까운 쪽에선 얼마든지 자유롭다. 굳이 부표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과 같다. 창조주의 영역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다. 죄의 시작은 이처럼 관계의 문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원죄가 없었다면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조주와 영원히 자유롭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둘째, 죄는 책임을 전가시킨다. 뱀은 여자를 미혹했고, 여자는 남자를 공범자로 만든다. 책임은 역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로 전가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최초의 죄는 불순종이었다. 죄를 짓게 되면 핑계되기 바쁜 오늘날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죄를 지은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속죄보단 핑곗거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려고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다. 구약에선 속죄제를 통해서 죄를 사하신 이야기가 가득하다. 신약에선 친히 성자 예수를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냈고 속죄양으로 십자가 형벌을 담당하게 하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이것이 기독교에서 전하는 구속사에 대한 핵심 교리다.
불순종하는 죄인들을 대신해 예수가 십자가 형벌로 구원의 길을 트셨지만 그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나 군중들은 위기에 처한 예수를 끝까지 믿지 않았다. 심지어 수제자인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죄는 거짓을 동반한다. 하지만 예수는 죄가 없으시기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은 원죄에서 출발한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대가로 영생을 얻은 것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장 7절)
셋째, 하나님은 자기를 닮은 사람이 성품까지 닮기 원하신다. 원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였지만 두 사람에게도 먹이고 입히시며 생육과 번성하도록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죄 사함을 원하는 인자한 분이다. 비록 교활한 뱀의 꾐에 넘어가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지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 것이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장 6절~7절)
하나뿐인 외아들 예수를 인류 구원의 역사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셨다. 주홍처럼 붉은 우리의 죄를 희도록 바꿔주시기 위해서.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장 18절)
이처럼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의 죄를 징벌보다 용서하기 원하셨다. 긍휼의 아버지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편 103편 10절~11절)
마치 부모자녀관계처럼 허물 많은 자식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베풀고 싶은 부모의 심정 같다. 혹여 징계가 필요하더라도 그 목적은 자녀가 뉘우쳐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악에서 벗어나 선한 삶을 살도록 원하신다. 채찍을 통해서라도 바른 길을 가게 하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히브리서 12장 6절)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라도 큰 잘못을 하고 부모 뜻을 거스르면 미운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자식이 악에서 돌아서기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마음을 쓰고 챙기려 한다. 속담만 봐도 육신의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진다. 하물며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하지 않겠느냐” (히브리서 12장 8절~9절)
하나님의 성품은 근본 선하시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구약 모두 하나님 사랑의 흔적에 관한 이야기기 넘친다. 잘못된 선택을 징계하면서까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언약궤를 임의대로 옮기고 전쟁터에 나가면 벌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사장만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사울왕은 자기의 조바심으로 제사를 대신했다. 그 결과 전쟁에서 대패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내세우고 나갔던 전쟁에서도 진 적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불순종으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즉, 하나님 뜻의 본질에서 벗어나 형식만 갖추고 불순종한 결과는 동일했다. 온전한 순종을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장 22절)
이 이야기는 사울 왕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했으나 사울은 순종하지 않았다. 특히, 좋은 가축과 상대국의 왕인 아각을 살려두었다. 명목상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구별한 것이라고 했으나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하나님은 사울의 행위를 꾸짖고 완전한 순종을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결과, 최초의 사람에게 내린 추방처럼 최초의 왕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 그 대신 베들레헴 이새의 막내아들인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삼았다. 가문에서 존재감 없이 목동지기로 살았던 다윗을 왕으로 세워 하나님은 가는 곳마다 대승하도록 이끄셨다. 사울과 반대로. 그래서 사울은 집권하는 동안 내내 다윗을 질투했고 죽이려 했다. 결국 전쟁에 나가 크게 중상을 입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최후를 맞이했다(사무엘상 31장).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1장 19~20절)
정리해 보자.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준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면 선이고, 그 뜻에서 벗어나면 악이다. 따라서 선에서 벗어난 상태나 행위는 모두 죄가 된다.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래서 불순종의 죄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독교에서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정한 윤리적 혹은 도덕적 기준이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순종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발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행위이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진 예수는 죽기까지 완전한 순종을 하셨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순종에 대한 완성된 모델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선 십자가 사랑과 온전한 순종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