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인류의 시작은 하나님 닮은 형상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여 적합한 짝을 만들어 주다

by 오로라


학창 시절, 진화론을 배운 적이 있다. 진화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생물이 변해온 과정을 설명하는 과학적 이론으로 변이, 자연선택, 적응이 반복되면서 종이 변화하는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사람도 진화로 설명하는 탓에 기독교 창조론과 대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의 기원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고, 창조론 역시 믿기지 않아 미스터리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환경에 적응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 하지만 사람은 진화의 과정으로 변화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론적 가치가 있다. 진화도 성장의 일부이지만 사람의 성장과는 차이가 있다. 즉,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같은 형태를 지닌다. 인류 기원의 초기 모습을 원숭이 형성처럼 그린 것을 본 적 있다. 진화론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실제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체형의 변화는 있지만 형상은 다르지 않았다. 비슷해 보이는 원숭이와 고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르다. 하물며 사람의 모습이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의 모습이 진화되었다고 볼 증거가 없다. 사람의 미라만 봐도 그렇다. 키와 골격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동이나 성인처럼 뼈의 크기가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한 형상이다. 이는 애초부터 사람이 진화의 과정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예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장 7절)



창조론적 관점에서 인류의 기원을 이해해 보자.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자기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최초의 사람을 창조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7절)


창조론을 믿지 못하는 일부 사람 중에 공룡 화석과 같은 발견을 근거로 제시하며 성경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며 부인한다. 창세기에 창조의 모든 내용을 일기처럼 기록하지 않았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명령을 받은 자들의 서술이다. 공룡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창조가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장 25절)


하나님의 창조적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눈으로 볼 수 없거나 증명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해된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자. 한국사를 이해할 때 모든 기록에 의해 이해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고구려와 고려시대 왕들의 이야기를 사극에서 볼 것이다. 드라마적 요소를 반영했더라도 고증을 하여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믿어지는가?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다. 하지만 왕의 기록을 남긴 사적을 통해 고증했기에 믿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사적은 왕의 모든 기록을 다 남긴 것일까? 가능하면 남기고자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성경처럼 낱낱이 기록하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분실이나 유실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창조의 역사도 비슷하다. 바다의 생물들을 성경에 일일이 열거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고 있다.


구약의 열왕기상하편을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왕에 따라 서사가 짧거나 길게 서술되어 있다. 역대상하로 이어지는 기록도 비슷하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즉, 이스라엘의 건국사에 등장하는 왕가와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된다. 그중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기록은 다른 왕들 보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우리나라에도 국가 운영을 위한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후대 왕을 위한 교훈서로 편찬된 역사책이다. 영조에 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가장 많다. 조선의 왕 중 83세로 최장수한 그는 재위 기간 역시 52년으로 가장 긴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왕 중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많은 이유 역시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축복으로 40년 동안 재위하고 나이 들어 죽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간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렸더라.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역대상 29장 26절~28절)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십 년이라. 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역대하 9장 30절~31절)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흔들림을 통해 풍향과 속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위력을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거나 증명하기 어렵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믿음의 문제로 신앙과 연관성이 깊다. 기독교에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이나 천사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사무엘상 3장을 살펴보면, 어린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집에서 성장할 때 여호와께서 불렀으나 나이가 어려 음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불렀다고 여기고 그에게 갔으나 아니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음성으로 불렀을 때 엘리도 깨달아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임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3장 7절~10절)



역대상 17장에서도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여 다윗왕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역대상 17장 3절~4절)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에 따라 때를 정하여 사람에게 나타나는 분이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디도데전서 6장 15절~16절)




과학적 연구를 위해 가설(假說)을 세운다. 가설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거짓 ‘가(假)’에 말씀 ‘설(說)’이다. 즉,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론 체계를 연역하기 위하여 가정(假定)을 세우는 것이다. 이런 연구는 아직 잘 모르거나 확인할 수 없는 현상 혹은 사실에 대해 미리 정해놓은 가설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연구자는 실험이나 관찰과 같은 연구설계에 맞는 방법을 통해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한다. 연구 수행 결과에 따라 가설이 맞는지 틀린지 밝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것도 있지만 연구 시도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진화론도 가설에 의한 연구처럼 과학적 호기심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옛사람들의 무덤이나 도시에서 발견된 뼈 조각이나 유물, 고서를 보면서 얼마든지 궁금증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적 주제에 따라 연구가 이루어져 인류 문명은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 없었던 컴퓨터나 휴대전화기의 발명을 넘어 이젠 AI기술이 산업 전반에 이용될 모양이다. 우리 삶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로봇도 그중 하나다. 앞으로는 AI친구와 더불어 사는 시대가 올 것 같다.





인류기원에 대해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치우쳐 참이나 거짓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입증할 자료가 마땅하지 않다고 진화론을 무시할 수도 없고, 창조론을 거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만물의 시작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장 3절~4절)




구약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최초의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했다. 창조된 그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겨 하나님이 적합한 짝을 만들었다. 하나에서 둘로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즉, 자기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구분하여 남자와 여자로 불렀다. 인류의 시작인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이브)의 탄생이다.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인류 역사를 만들었다. 처음엔 고작 두 사람뿐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증가했을까 의문이 들 수 있다. 특히, 서로 다른 인종의 출현은 더 그렇다. 합리적 의심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대목에선 고개가 갸웃거려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쉽게 이해해 보자.


예를 들어, 사람의 피부색을 밝은 정도에 따라 1부터 100까지 표시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1에 가까울수록 희고, 100에 가까울수록 검은 편이라고. 같은 지역에 있는 흙이라도 색깔과 점성이 다른 것처럼 성질은 균일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든 아담의 피부색이 50톤 정도라고 생각해 보자. 그의 짝인 하와는 아담보다 밝은 30톤 정도의 피부였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셋의 피부색이 모두 다르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는 아빠의 피부 보다 진한 70, 둘째는 엄마의 영향을 받았지만 훨씬 더 밝은 10 정도, 셋째는 아빠랑 동일하게 50톤의 피부색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식들이 개인차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유전에 대한 간단한 지식만 있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최초의 가정에서 출발한 사람들의 피부색은 노아에 이르기까지 계속 태어난다. 성경에 따르면 당시 평균수명은 매우 길었다. 이는 창조주가 생육과 번성을 명하고 오래 살게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930세(창세기 5장 5절), 그의 아들 셋은 912세(창세기 5장 8절), 에녹은 365세(창세기 5장 23절), 므두셀라는 무려 969세(창세기 5장 27절)까지 살았다. 대홍수 심판 이후까지 살았던 노아 역시 950세(창세기 9장 29절)로 엄청난 장수 노인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긴 세월 동안 살았으니 자식이 얼마나 많이 태어났을지 상상해 보라. 에서와 야곱처럼 쌍둥이까지 태어났다면 인구 증가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출현은 자명하다. 후대 그것을 인종으로 분류했다고 이해하면 어떨까?


한국도 갈수록 기대수명이 길어진다. 과거에는 60~70년 정도에 사망하는 예가 더 많았지만 요즘엔 100세 시대라는 말이 흔해졌다. 80~90세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초고령화에 접어들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출생아의 평균 숫자는 이전보다 줄었다. 1950~60년대는 5~6명은 기본이었다. 간혹 열 명 이상의 자녀를 둔 부모도 있었다. 창조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약시대를 살아온 사람처럼 생육하고 번성했다면 인류의 출현과 증가는 너무나 당연하다. 역대상에 보면,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계보를 이름으로 나열하고 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 (역대상 1장 1절~4절)


자식이 없어 애를 태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사라와의 사이에서 이삭을 낳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종이 낳은 이스마엘에겐 더 많은 후손을 허락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니 그의 맏아들은 느바욧이요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미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라. 이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 (역대상 1장 28~31절)


그 외 다른 말씀을 통해서도 살펴볼수 있다. 예수로 이어지는 족보를 보면 계속 자손들이 태어나고 죽지만 연속된다. 다윗의 경우 여러 아내 사이에게 자식이 태어났고(역대상 3장 1절~9절),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아내가 기록으로만 1,000명이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열왕기상 11장 3절)



다윗이 인구조사(역대상 21장 1~2절)를 실시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전쟁에 필요한 전략적 행정이기도 했지만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라 시간을 들여 수효를 파악했다. 요즘도 국가 단위의 전수조사인 인구 센서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 정책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조사인 만큼 여러 가지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구 통계를 위한 자료 뿐 아니라 가구 형태, 주택 유형, 소유 형태 등등 미래 인구 구조를 반영하여 정책을 만들기 위해 5년마다 실시한다. 구약을 보면 전쟁사가 많다. 패전국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과의 혼인관계도 이루어진 것을 고려해 볼 때 인종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최초의 사람 아담 이후에 태어난 자손들의 족보를 상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부색 50톤의 아빠와 30톤의 엄마 하와로 출발했지만 1부터 100 사이에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세대가 지나면서 비슷한 유형이 많아지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속성 때문이다.


더 쉽게 이해해 보자. 색깔이 다른 두 가지 점토를 일정 비율로 섞어 보자. 혼합 정도에 따라 다양한 색이 만들어지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감을 섞어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것이다. 혼합하면 처음과 같은 색은 절대로 나올 수 없다. 비슷해 보여도 다른 색이다. 다채로운 색이 계속 만들어진다. 마치 창조의 비밀처럼.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봐도 그렇다. 혼합률뿐 아니라 가마의 온도, 굽는 시간과 건조 방법에 따라 그 빛깔은 더 다양하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도 조명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비슷한듯 다른 제각각의 빛이 존재한다.


피부색을 예시로 들었지만 창조의 질서에 따라 인류는 하나님의 설계로 지금도 존재한다. 여전히 100퍼센트 일치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신기할 따름이다. 복제동물까지 만들어내는 기술을 인간이 가졌다고 해도 창조주처럼 사람을 다변화할 수는 없어 보인다. 유전자 검사를 봐도 그렇다. 친자 확인검사 결과지를 보면, 두 사람의 유사율을 백 퍼센트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95.9999로 9의 반복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람의 머리털까지 셀 정도인 창조주만의 능력이다. 사람은 그의 피조물로 각기 다르게 창조되는 DNA가 있기 때문이다. 귀하게 만들어진 존재라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장 29절~31절)


영원히 동일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기술까지 인간이 흉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도달할 수 없는 창조주인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론의 관점으로 성 정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정체성은 외적인 모습의 변화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젠더 문제는 또 다른 논쟁이 되지만 반드시 정체성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몇 년 전, 국내에서 두 가지 관심을 끄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하나는 자기 의지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군인에 관한 것이다. 남성 군인은 성전환 수술을 했기 때문에 여군으로 복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강제 전역 결정에 불복하면서 소송을 냈다. 또 하나는 여대에 합격한 트렌드젠더 대학생에 관한 것이다. 여대에 합격한 후 커밍아웃 사실을 밝힌 예비 대학생이었다. 학내에선 입학 여부에 대한 찬반여론이 뜨거웠다. 결국 학생 스스로 입학을 포기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재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기사화되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 사건을 살펴보면, 둘 다 성 정체성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타고난 성별을 상대 성으로 전환했다고 본질까지 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성 역할 갈등이 일어날 수 있어 정체성 혼란 문제로 접근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창조주가 만든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다른 성(性)은 존재할 수 없다. 즉, 성별은 남자 아니면 여자 뿐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자기 성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대 성이 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별을 결정짓는 본질은 창조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성 역할 수행의 어려움으로 반대 성을 동경하거나 전환하고 싶은 심리는 이해해야 한다. 전환 수술로 외적인 모습을 바꾸더라도 성별의 DNA 속성까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드물지만 성 정체성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 종종 그들의 개인사를 역추적해 보면 성추행이나 성폭행 혹은 부모나 주변인의 성 역할 정체성으로 생긴 트라우마로 자기 성에 대한 불만, 혐오가 커져 이런 선택에 이른 예도 없진 않다. 유난히 반대 성으로 바꾸고 싶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 이성 부모나 형제, 다른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때때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심리적, 정신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 성 전환 유무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로든 성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거나 바꾸려는 시도는 창조주의 관점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성전환 수술을 하면 이후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겠으나 또 다른 갈등을 배제하기 어렵다. 각자의 성이 지닌 고유성 때문이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성 역할 문제를 경험하는 사례가 있다. 성 정체성의 혼란은 새로운 심리적 문제를 초래한다. 정신과적 문제에 부딪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성별은 개인이 임의로 바꿀 수 있는 성질이 아니란 사실만 인식하게 되는 사례가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성전환 수술 환자나 동성애자를 생각해기 앞서 고려할 것이 있다.

인간은 태어난 직후부터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별에 따른 조화로운 경험이다. 만약, 지속해서 부조화를 경험한다면 왜 그런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타고난 성에 대한 불만으로 고민이 과도해진다면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자. 특히,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청소년기엔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급격한 신체적 성장과 내면의 갈등으로 격동기를 맞이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란 말이 괜히 있지 않다.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성적 욕구와 같은 것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 시기 성 정체성 발달은 인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인격적이라고 말한다. 주어진 고유한 성에 따라 형성되는 성 정체성 확립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인간의 발달 중 하나라는 사실로 성에 대한 접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혼란의 시기를 겪는 대상자가 있다면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난보다 그 사람의 심리적, 정신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자세가 인격적인 접근으로 매우 중요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저마다 창조의 목적을 부여했다는 것이 성경적 가치다. 그래서 피조물은 목적대로 살아야만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그것을 보통 사람들은 자유라고 말한다.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창조 질서 안에서 이루어질 때 보다 본질적이다. 자유 밖의 것을 원하는 것이 탐욕이다. 죄의 시작은 인류의 탐욕 때문이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다 먹어도 좋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한 가지를 탐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자유의지는 방종과 다른 기준에 속할 때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것을 보면 마음에 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의미는 순종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불순종의 싹이기 때문디다. 보이지 않는 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신앙적 진정성이 순종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섭리인 질서에 불순응하고 분순종하는 것은 피조물이 하지 않아야 하는 선택이다. 진정한 평안을 잃어버린 에덴 동산의 사건을 기억하라고 신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허락했다.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서 출발했다. 죄가 존재하지 않았던 창조주와 살았던 낙원에 대한 꿈을 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선 이런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써 인류를 구원시켜 주었다. 타락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할 희생양으로 예수를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의 시작이 신약의 중심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아버지의 마음으로 구원의 역사를 또 만들어 주신 것이다. 우리도 좋은 사람과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러므로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처럼 인격도 그와 닮은 참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창조주와 동행하며 살았던 최초의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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