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기억해 줄게
우리는 대현이를 앞세우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누구도 무거운 정적을 깨지 못했고 그렇게 아무 소리 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신발주머니가 종아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이따금씩 깰 뿐이다.
골목을 여러 번 지나치자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목공소가 있었다.
큰 나무 널빤지가 전기톱을 지나가자 기계 굉음이 온 동네에 울렸다.
그 아이의 집은 목공소 한다고 들었기에 한눈에 저기라는 걸 알아보았다.
아버님은 한창 일하는 중이셔서 우리가 온 지도 모르셨다.
큰 나무 널빤지를 잡아주는 이 없이 혼자 하시느라 버거워 보였다.
분진을 뒤집어써서 그런지 백발의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널빤지가 두 동강 나고 톱날이 멈추자 반장이 목에 힘주어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분진 사이로 우리를 확인하시고는 미소를 지으시며 반겨주셨다.
인자한 미소에 하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반장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우리도 따라 인사했다.
선생님께 들어 문병 왔다고 하니 아버님은 목공소 안에 딸린 작은 방을 가리키시며
곧 입원 예정인데 몸이 안 좋아서 만날 수는 없다고 하셨다.
많이 아프다는 건 알지만 잠시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또 다시 가슴이 아팠다.
반장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아버님은 어찌 된 일인지 나를 아셨다.
"네가 그 부반장이구나. 우리 아들이 미안한 짓을 했다고..."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후에 뭐라고 하셨지만 나는 머리가 하얘져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미안한 짓 한 적 없다고, 내가 멋대로 좋아해서 괴롭혔다고 어쩌면 이렇게 아프게 만든 게 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눈물 때문인지 용기가 없었는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친구가 말해줬다. 그때 아버님이 하신 말씀은 민성이가 널 좋아했다고.
민성이가 생일에 못 온 이유는 생일 선물을 사려고 토요일에 아버지 일을 도와드렸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민성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했다.
민성이와 좋았던 기억보다 내가 차갑게 굴고 못된 말만 했던 게 떠올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문뜩 민성이가 준 선물이 기억이 났다.
영주가 골라줬다는 말에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던 생일 선물이었다.
포장지를 뜯어내니 핑크색 3단 지갑이 나왔다.
거기에는 카드가 들어 있었다.
나영아 생일 축하해. ps. 잃어버리면 또 사줄게.
지갑을 가슴에 안고 흐느껴 울었다.
'제발 낫기만 해 줘. 내가 좋아해서 너를 힘들게 했다면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게.'
속으로 소리치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민성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가끔 우리에게 편지 쓰는 시간을 갖자고 하셨는데
나는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몰라서 한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에 있다는 소식만 간간이 전해 들을 뿐이었다.
그러다 민성이가 많이 좋아져 퇴원까지 앞두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로 학교에 올 수는 없겠지만 난 기다릴 수 있다.
이제 얼굴 보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믿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감기에 걸려 숨을 거뒀다고 선생님은 어렵게 입을 떼셨다.
나는 죽음이란 걸 잘 몰랐다.
하지만 더이상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모두 책상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고 나는 무너졌다.
그 아이의 고통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그 아이는 내 마음을 알았으려나.
꽤 오랫동안 잊힌 얘기를 꺼내며 예쁘지도 않은 짝사랑의 추억이 나를 아프게 한다.
많이 아프고 외로웠을 텐데 짝꿍이었을 때 너에게 더 웃어주고 더 아껴줄걸.
내가 제일 가까운 친구가 되어줄 걸.
'좋아하는 마음이 나만 그런 것 같아서 방법을 몰랐었나바.
사랑은 아름다운 거니까 다른 걸 보태면 안되는 건데, 미안해.
흰 바통을 높이 들고 환하게 웃으며 결승선으로 달려오던 미소를 절대 잊지 않을게.'
끝
꽃잎
꽃잎처럼
스러질 목숨이라면
꽃잎처럼
살기로 하자
이 세상 무수히 많은
꽃잎들 중의
이름 없는 하나로
살기로 하자
나는 나의 꽃으로
너는 나의 꽃으로
세상의 어느 모퉁이
한 점 빛이 되기로 하자
이 짧은 목숨 마감하는
그 날까지
꽃잎처럼 순하게
살기로 하자
-정연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