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안목에 대하여
나는 지루하고 소모적인 작업을 할 때면 종종 피아노 연주 영상을 틀어놓는다. 클래식에 특별한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보상 심리가 작동한 것 일 수도 있다.
특히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 발라드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음악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피아노 건반 위를 물 흐르듯 움직이는 유려한 손가락이다.
한 음, 한 음을 짚어내는 손끝이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정교해서, 저 손가락을 한 번쯤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연주를 보고 있자면 음악에 취한 것인지, 손가락에 반한 것인지 ‘섬세하다’라는 단어가 세트처럼 따라온다.
섬세는 가늘 섬(纖)에 가늘 세(細)를 쓴다. 가늘다는 한자를 두 번이나 반복할 만큼 가늘고 세밀하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을 섬섬옥수(纖纖玉手)라고 불렀다. 그런 손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라니 아름다울 수밖에.
쇼팽은 섬세하고 화려한 피아노곡을 남겨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렸다. 마치 하나의 시를 쓰듯, 건반 위로 아름다운 단어들이 흘러내릴 때 우리는 단순한 연주를 넘어 한 편의 가사 없는 노래를 듣게 된다.
‘섬세하다’는 말은 곱고 가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매우 찬찬하고 세밀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마치 실타래를 한 올씩 풀어내듯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그런 눈이 있을 때 작은 차이조차 알아차리는 안목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획자의 습성 때문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단어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 같은 의미라도 조금 더 정확한 말을 찾고 싶었고, 같은 문장이라도 조금 더 미묘한 감정을 담고 싶었다. ‘섬세’라는 말은 보고 있어도 그립고, 한 번쯤 만져보고 싶은 섬섬옥수 같은 말이다.
좋은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전략이나 자본, 혹은 마케팅을 이야기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그런 현실적인 준비 외에도 비장의 무기처럼 소장하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섬세한 안목’이다.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눈. 작은 차이를 알아보는 감각 말이다.
역사 속에서도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의 정치가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 시대의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였다. 그는 고려청자를 대량으로 사들여 일본 귀족들에게 선물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그 청자를 조선의 고종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고종은 이 푸른 그릇이 어디서 만들어졌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것이라고 설명해도,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 없는 것이라며 믿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씁쓸한 장면이 아닌가.
감각의 설계제들이라는 책에 보면, "브랜드는 상품을 넘어 경험이 되고, 공간은 감정을 설계하는 무대가 되며, 소비자는 고객에 머물지 않고 감각을 주도하는 주체가 된다. 나는 이것을 '감각 자본sensory capital'이라 부른다." 라는 부분이 있다. 작가가 말하는 감각 자본은 '안목'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패션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옷의 차이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원단의 감촉, 재단의 균형, 실루엣의 미묘한 선까지.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까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준비할 시간에 프로토타입부터 빠르게 만들라고, 계속 만들다 보면 하나씩 알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시작은 충분히 경험을 했고, 또 무작정 뛰어들 만큼 대담하지 못하다. 변명 같겠지만, 실패를 넉넉히 이길 만큼 단단한 사람도 되질 못했다.
그렇다고 안목을 키우기 위해 전문 클래스를 듣거나 거창하게 공부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작은 틈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자주 흐르게 한다던가, 좋은 책을 우연히 만나는 행운을 기대하는 마음 정도. 혹은 멋진 물건 앞에서 조금 더 머무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소박한 사치를 누리고 싶다.
섬세한 시선과 손끝으로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고, 그 감각이 쌓여 브랜드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언년아~ 얼마나 좋아!)
브랜드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브랜드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여야 하고,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만들고 싶다면 진정성은 기본이고, 오목조목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 즉 안목도 함께 길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