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본으로
무언가를 오래 고민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더 복잡한 길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가장 단순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 많은 생각을 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아주 단순한 논리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는 답을 알고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난 뒤에도 그랬다. 수없이 많은 옷을 떠올렸다. 잡지를 사서 보고, 트렌드, 디자인, 실루엣, 마케팅, 타겟 시장 등. 그러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질문은 점점 단순해진다.
패션의 가장 기본은 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 남은 것은 의외로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청바지와 면 티셔츠.
그 중 면티셔츠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옷이 아닐까. 그러나 동시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아이템이기도 하다. 티셔츠는 원래 군복의 속옷에서 시작해 일상의 패션이 되었고,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는 교복이 되었다.
패션이 아무리 화려해져도 누구나 면 티 한 장은 가지고 있듯이. 옷장에서 손이 가기 가장 편한 자리에도 터줏대감처럼 면 티가 놓여 있다. 새것을 사서 입다가 늘어나면 집에서 홈웨어로 입으며 본전을 뽑는 옷이 바로 면 티셔츠가 되시겠다.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패션 산업은 늘 새로운 것을 선보이지만, 사람들의 몸은 익숙한 것을 찾는 것 같다.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쉽게 입을 수 있는 옷 말이다.
그래서일까 기본에 집중하며 진가를 발휘하는 브랜드가 성공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제임스 펄스(James Perse) 같은 브랜드는 화려한 패션이 아니라 ‘좋은 기본 옷’에 집중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처음부터 복잡한 디자인이 아니라, 고급 면 소재의 티셔츠와 기본적인 캐주얼웨어로 승부사를 던졌다. 그들의 철학은 단순했다. 좋은 원단과 편안한 실루엣으로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코스(COS) 역시 비슷한 방향을 택했다. 시즌 유행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미니멀한 기본 옷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무인양품, 즉 무지(Muji) 역시 기본에 충실한 브랜드로 빼놓을 수 없다. 화려한 디자인이나 과도한 장식을 지우는 대신,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검소한 기본기에서 출발했다.
로고 조차 보이지 않게,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건을 정직하게 만드는 철학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 브랜드가 되었다.
결국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기본을 더 잘 만들었다'는 것.
나는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본다. 패션의 기본은 무엇일까. 아마도 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면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진 옷, 바로 면 티셔츠.
하지만 ‘면’이라고 말하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면에도 종류가 많지 않은가.(끝이 없구먼...)
실의 굵기, 짜임, 산지, 가공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된다. 어떤 면은 가볍고, 어떤 면은 묵직하며, 어떤 면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아름다워진다.
겉으로 보면 모두 비슷한 티셔츠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선택과 기준이 숨어 있다. 어떤 면을 사용할 것인가, 어떤 감촉을 남길 것인가, 얼마나 오래 입을 수 있을 것인가. 비침은 어느 정도인지, 신축성과 컬러는 어떻게 할 것인지.
결국 기본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가장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복잡해질 때,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Back to the Basic. 그래, 쫄거 없다. 처음부터 하나씩 만들어가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브랜드와 옷에 대해 러프하게 정의해 본다. 음, 생각나는데로 쭉 적어보면,
1.기본 면 소재를 잘 다루는 브랜드
2.저렴해 보이지 않는 고급스러운 티셔츠
3.복잡한 디자인이나 화려한 패턴이 아닌, 기본에 충실한 아이템
4.입기 편하고 관리하기 쉬운 옷
5.핏이 좋아 어떤 코디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옷
6.중요한 사람에게 선물해도 부끄럽지 않은 제품
7.할머니가 될 때까지 입고 싶을 만큼 애착이 가는 티셔츠
8.정성껏 만들고 쉽게 멈추지 않는, 오래가는 브랜드
의미를 바꾸지 않고 지금의 8가지 생각을 하나의 철학으로 묶어 압축하면 세 축으로 정리된다.
① 소재
② 옷의 기준
③ 브랜드 태도
다시 정리하면 우리의 '브랜드 철학'이 된다.
1.우리는 기본 면 소재를 가장 잘 다루는 브랜드가 된다.
2.단순하지만 저렴해 보이지 않는 티셔츠, 편안한 핏으로 어떤 코디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옷을 만든다.
3.중요한 사람에게 선물해도 부끄럽지 않는, 자랑하고 싶은 브랜드가 된다.
4.오래 입을수록 애착이 생기는, 오래가는 브랜드를 만든다.
훗날 이 글을 다시 보며 ‘이러니 망했지’ 하고 웃게 될지도 모르고, ‘이때는 이런 생각도 했었네’ 하고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록해 두지 않으면 어떻게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는 것 같은 요즘이다. 가능한 한 모든 생각을 남겨두려 한다. 조금은 어설프고 철부지 같은 생각이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인 티셔츠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일단 면이 무엇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티셔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등 소재에 대한 기본 공부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갈 길이 멀지만, 한 땀 한 땀,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