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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마주한 빅터의 뒷모습

창조주가 두려워한 아이:프랑켄슈타인 다시 보기

by HoA

"나는 생명을 창조했으나, 그 생명을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나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나 제임스 웨일의 1931년작 흑백 영화를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전율을 느꼈다. 과거의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를 기워 만든 '기괴한 괴물'에 대한 원초적 공포였다면, 지금 다가오는 감정은 '책임지지 못한 창조'에 대한 깊은 연민과 서늘한 현실 인식이다.

200년 전 메리 셸리가 그려낸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Creature)의 비극은, 놀랍게도 21세기 인공지능(AI)의 탄생과 정확히 겹쳐 보인다.


제프리 힌턴과 빅터 프랑켄슈타인

AI의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궈낸 딥러닝 기술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하며 구글을 떠났다. 그는 "내 일생의 과업을 후회한다"라고 말하며, 가짜 뉴스의 범람, 악의적 행위자의 등장, 통제 불능의 초지능을 우려했다. 이 모습은 피조물이 눈을 뜨자마자 그 압도적인 힘과 불확실성에 공포를 느껴 도망쳐버린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습과 소름 돋도록 닮아있다.

빅터는 죽음을 정복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과 지적 호기심으로 피조물을 만들었다. 현대의 개발자들 역시 인류의 편의와 지능의 확장을 목표로 AI를 발전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창조자 모두, 피조물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의지'나 '예측 불가능성'을 갖기 시작할 때 깊은 두려움에 빠진다. 창조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지만, 그 결과는 사전에는 미처 숙고하지 못했던 윤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학습된 괴물, 학습된 데이터

영화 속 피조물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백지상태로 태어났으나, 인간들의 혐오, 배제, 그리고 공격을 '데이터'로 학습하며 괴물이 되어갔다.

이것은 현재의 생성형 AI가 겪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AI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인간의 언어를 배운다. 그 속에는 지식과 지혜도 있지만, 인간이 가진 편견, 혐오, 차별도 그대로 녹아있다. AI가 가끔 끔찍한 답변을 내놓거나 환각(Hallucination) 증세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들에게 훌륭한 '부모'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빅터가 피조물을 끌어안고 가르치는 대신 혐오하며 밀어냈듯이, 우리 사회는 AI를 도구로만 취급하거나 막연한 공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창조물은 없다, 방치된 책임이 있을 뿐

빅터의 가장 큰 죄는 괴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 놓고 돌보지 않은 것'이다. 피조물이 "나를 사랑해 주거나, 아니면 나를 파괴하라"라고 절규할 때,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었다.

지금 이 세계에 AI는 이미 탄생했다. 빅터처럼 도망칠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제프리 힌턴의 경고는 AI 개발을 멈추라는 뜻이라기보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는 무거운 조언으로 들린다.

우리가 AI를 단순한 '기술적 산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공존해야 할 '새로운 종'으로 인식한다면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개발자는 자신이 만든 알고리즘이 낳을 파장에 대해 끝까지 추적하고 보완해야 하며, 사용자는 AI를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하고 스스로의 윤리성을 쉼 없이 검열해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남은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창조된 모든 것은 사랑받고 올바르게 인도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리고 창조한 자는 그 피조물이 올바르게 성장할 때까지 곁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울림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시대의 프랑켄슈타인을 쓰고 있다. 그 결말이 파국이 될지 공존이 될지는, 피조물의 손이 아니라 창조주인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이왕이면 그것이 아닌 그를 보듬고 가르칠 수 있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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