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사고를 외주화 하면 인간의 뇌가 퇴화한다는 MIT의 연구 보고가 있었다.(Your Brain on ChatGPT: Accumulation of Cognitive Debt when Using an AI Assistant for Essay Writing Task)
최근에는 AI 신용평가를 도입한 독일 은행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대출 심사역의 역량이 오히려 하락했다는 논문도 발표된 바 있다. 모델의 정확도는 개선되었지만, 평가를 수행하던 인간이 점점 판단에 개입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개인의 태만이나 무능의 문제가 아니다.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인지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이라 부른다. 기억과 계산, 판단과 해석 같은 인지 활동의 일부를 외부 도구에 위임하는 행위다. 메모장, 계산기, 내비게이션, 그리고 이제는 AI까지. 우리는 오래전부터 생각을 밖으로 꺼내 쓰며 살아왔다.
문제는 오프로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방식과 깊이다.
AI와 함께 일할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곤 한다.
성격이 급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동시에 연결하고 싶은 내 성미에 AI만큼 잘 맞는 동료는 없었다. 생각의 속도를 맞춰주고, 지치지 않고 반응하며, 정제된 답을 내놓는 존재. 그것은 분명 인간의 인지 능력을 확장시키는 도구였다.
항상 접근 가능하고, 자동적으로 사용되며, 내부 사고와 기능적으로 결합된 도구는 더 이상 외부가 아니라 사고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우리의 사고 구조 안으로 침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고의 확장처럼 보이는 이 현상은 언제든 의존으로 바뀔 수 있는 경계에 있다.
AI의 답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점점 이 아이의 답변을 효율화하는 방식으로 내 질문을 맞추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진짜 원초적 질문에서 의문의 초점이 “AI에게 이렇게 물으면 더 좋은 답이 나올까?”
“이 답을 조금 더 다듬으면 완성도가 올라갈까?”에 대한 최적화로 옮겨가는 것이다.
인간이 질문을 만들고 AI가 답하던 관계에서,
AI가 잘 답할 수 있는 범위에 맞춰 인간이 질문을 조정하는 존재로 바뀌는 미묘한 주객전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고를 외주화 한 결과,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묻고 싶은지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물어야 더 그럴듯한 답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질문은 점점 도구 친화적으로 변하고, 사고는 도구의 출력 공간 안에 갇힌다.
이 장면은 산업 현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반복된다.
회사에서는 초보 심사역들이 자동평가 결과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베테랑들의 걱정이 가득하다.
모델이 내밭는 숫자는 정교하고 설명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 판단이 왜 맞는지”, “어떤 상황에서는 틀릴 수 있는지”를 묻는 순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판단은 이미 기계가 했고, 인간은 그 결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자동화 편향이며, 반복될수록 숙련은 축적되지 않고 사라진다.
진짜 문제는 아이들, 그리고 사회 초년생이다. 집에서는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의 영어 수행평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AI가 작성한 영어 수행평가 답안은 문법적으로 완벽했고, 완결성도 높았다. 그러나 그 글에 아이의 삶은 없었다. 사건은 있었지만 진짜 경험은 없었고, 문장은 있었지만 서사는 없었다.
“AI를 써도 좋지만, 네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좋지 않겠니?”
라는 물음에 아이의 대답은 명료했다.
“점수 잘 받는 거랑은 상관없어요. 시간도 부족한데 그냥 이건 문제 조건에 맞게 쓰면 돼요.”
그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바쁜 아이의 일정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의사결정이다.
학교라는 곳에서는 줄 세우기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여전히 조건을 충족하는 능력과 정답을 재현하는 능력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과정은 점수화되지 않고, 비판의 질은 평가 항목에 없다. 그러니 아이는 자연스럽게 정답을 가장 잘 만들어내는 존재, 즉 AI를 선택한다.
생각하지 않는 시대, 정작 훼손되는 것은 질문하는 힘
인지 오프로딩이 가장 먼저 훼손하는 것은 기억이나 계산 능력만이 아니다.
여전히 '효율성'의 가치가 지지되는 사회에서 가장 먼저 퇴화하는 능력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힘일 수도 있다.
AI는 답을 잘하지만, 무엇이 진짜 중요한 본질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답에 길들여질수록 인간은 점점 그 답에 맞는 질문만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그다음에 해야 할 질문지까지도 만들어주는 것이 현재의 추론 모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AI와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할 때다.
우리는 결국 AI에게 지는 게임을 하고 있다. 속도에서도, 정확도에서도, 기억에서도 인간은 열세다.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거나 지나쳐 갈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AI와 함께하되 그를 나의 플레이그라운드로 불러오는 것.
답을 대신 생각하게 두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답을 의심하고, 질문을 확장하고, 맥락을 부여하는 역할을 내가 맡는 것.
AI는 사고의 가속기일 수 있지만, 사고의 방향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를 외주화 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AI 사용 금지가 아니다.
사유의 주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느리지만 불편한 결심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나의 삶—
아이와, 동료와, 그리고 아직 스스로 질문하려 애쓰는 나 자신을—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정답의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키는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