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정보의 소음 속에서 틔우는 우리만의 서사: 한병철의 비관론을 넘어

by HoA

한병철 교수의 《서사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정신적 본질을 어떻게 마모시키는지에 대한 서늘한 경고장이다. 그의 진단처럼 단편적인 사실들이 맥락 없이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진실이 호도되는 디지털 세계의 풍경은 우리에게 깊은 반감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던 한 줄기 불편함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서사 없이 상업적 스토리텔링만을 쫓는 존재로 규정하는 그의 단호한 시선에 있었다.

과연 우리는 그저 파편화된 세계의 무력한 희생자일 뿐인가? 나는 이 소음 가득한 디지털 세계 안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그물을 짜고 있다고 믿는다. 한병철이 우려하는 ‘맥락의 소거’는 분명 경계해야 할 지점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위기의식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더 정교한 관점과 대안을 고민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따라서 나는 그의 주장을 귀담아듣되, 현재 우리의 삶을 무조건적인 비판의 감옥에 가두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각자의 배경과 기술, 그리고 서로 다른 맥락 하에서 여전히 나름의 방식으로 진실된 서사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한병철의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그 비관론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주체적인 ‘안목’과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철학자 한병철의 경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은 서사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작 《서사의 위기》에서 현대 사회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미가 고갈된 시대’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시대의 정보는 본질적으로 'Stock’의 성격을 띠며, 이는 삶의 연속적인 ‘흐름(Flow)’을 파편화하여 서사의 힘을 무력화한다. 정보는 그저 ‘있을’ 뿐이며, 깊은 사유와 경청이 필요한 서사와 달리 휘발적이고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정보를 소비할수록 삶의 의미를 엮어내는 ‘이야기하는 인간(Homo Narrans)’으로서의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정말 서사의 적인가? 로라 넬슨의 반증

하지만 한병철의 진단처럼 데이터가 반드시 서사를 파괴하기만 하는 ‘멈춰있는 순간’인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자 로라 넬슨(Laura Nelson)이 주창한 ‘Computational Grounded Theory’은 데이터가 어떻게 거대한 담론과 서사의 재료가 될 수 있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넬슨은 1970년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분석하며, 시카고와 뉴욕의 수천 건의 뉴스레터와 회의록이라는 누적된 데이터를 분석했다. 단순히 단어 빈도를 센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 사이의 연결망을 추적하자 놀라운 ‘지역적 서사’가 드러났다. 시카고는 ‘지역사회’와 ‘관계’ 중심의 실천적 서사를, 뉴욕은 ‘권리’와 ‘해방’ 중심의 이데올로기적 서사를 구축하고 있었음이 데이터로 증명된 것이다. 또한 성과 평가서 데이터를 통해 남성에게는 ‘능동적’ 단어가, 여성에게는 ‘보조적’ 단어가 쓰이는 양상을 포착하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 편향이라는 ‘숨겨진 서사’를 폭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데이터는 해석자의 ‘관점’과 결합할 때, 오히려 파편화된 사실들을 거대한 맥락으로 엮어주는 가장 신뢰할 만한 도구가 된다. 넬슨의 사례에서 보듯, 데이터는 서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는 미처 다 보지 못했던 거시적 흐름을 가시화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왜 최고의 데이터 분석가는 사유하는 인간 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진정한 의미의 데이터 분석은 단순히 숫자를 처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 속에 숨겨진 맥락을 읽어내어 의미 있는 흐름(Flow)으로 재구성하는 ‘서사적 작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자기만의 안목을 가진 철학가야말로 가장 훌륭한 데이터 애널리스트가 될 수 있다. 데이터는 ‘무엇(What)’이 일어났는지는 말해주지만, ‘왜(Why)’와 ‘어떤 의미(So what)’인지는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데이터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인과관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는 ‘철학적 사유’가 없다면 분석은 소위 데이터를 '양적 방법론'의 단순한 작업으로 여기는 지식인들의 견해처럼 그저 숫자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병철이 우려한 ‘서사의 위기’는 데이터 때문이 아니라, 데이터를 서사로 꿰어낼 ‘철학적 안목’이 희귀해진 현상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데이터 분석가는 단순히 코딩 기술자가 아니라, 데이터를 벽돌 삼아 인류의 새로운 담론을 설계하는 ‘서사 전략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우를 넘어, 새로운 서사의 주체로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유와 경청의 가치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비평이다. 하지만 데이터가 맥락을 무시하게 만든다는 그의 단정은 현대적 주체가 가진 능동성을 간과한 ‘기우’ 일 수 있다.

우리는 정보의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데이터 속에서 의미의 흐름을 발견해 내는 주체이며 그래야만 한다. 철학적 안목을 가진 이들이 데이터를 도구 삼아 더 정교하고 단단한 서사를 구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사의 위기를 극복하고 데이터를 지혜로 변모시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서사의 운명은 데이터의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깊은 ‘눈’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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