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by HoA

81년생인 나는 82년생 후배 둘과

퇴근 후에 이 영화를 보러 갔다.

이이 둘 딸린 워킹맘인 나에겐

서재에서 아들내미 숙제 봐줄 남편과

녹초가 된 몸으로 둘째 곁에 비스듬히

누워계실 친정엄마 생각에 영화 보는 일이란

편치 않은 외유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이 영화를 같이 보자는

후배의 말에 슬쩍 이끌려갔다.

워낙 매체에서 이야기들이 많았던 영화라

궁금한 마음이 있기도 했다.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사연이 얼마나 기구한지

그녀는 도대체 어떤 병에 걸린 건지

인터넷 상에서 그리도 욕을 먹던 시어머니는

얼마나 몰지각했는지

어느 정도로 비루한 삶이어야

영화 속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영화는 의외로 너무나 잔잔했다.

그저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다소 기이한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는 것 외에는

지극히도 현실에 맞닿아있었다.

누군가에게 극적 일지 모를 이 이야기가

이 사회를 살고 있는 81년생 여성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스토리일 뿐이었다.

아니 김지영의 삶은 현실의 82년생

김 아무개보다는 심지어 나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김 아무개의 남편은 공유처럼 잘생기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퇴근하자마자 재킷을 벗어던지고

아이 목욕을 시키는 전업주부 와이프를

돕고자 욕실로 허겁지겁 들어오지 않는다.

본인보다 월급도 적고 고용도 불안정한

직장에서 일하겠다는 와이프에게

당신이 행복하면 된다고 말하며

육아휴직을 낼 생각 역시 쉽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 수많은 키보드워리어의 질타를

받던 시어머니조차 나를 비롯한 선후배의

시어머니와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정상적인

범주에 속해있었다.

대개의 시어머니는 며느리 자아실현을 위해

육아휴직을 내겠다는 아들을 한심스러워하고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든 유난스러운

며느리를 못마땅해한다.

물론 이 보편이라는 것이 단지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지

합리나 도덕의 잣대로 내린 판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이 우리가,

82년 즈음 태어난 수많은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다.

영화를 보며 후배는 중반부터

통곡과 훌쩍임을 번갈아가며 울기 시작했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은

극 중 지영의 엄마가 딸이 빙의한 모습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하며 오열하는 장면에서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가부장적인 집안 환경, 십 대 소녀가

겪는 성폭력에 대한 불안감, 직장에서의

성차별, 결혼과 출산 후 겪는 상실감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여자라는 이유로 딸이 불필요하게

겪어내는 삶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맘 졸이는 엄마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82년생 지영은 가족의 사랑과

배려 안에서 산뜻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덜

갑갑해 보이는 삶을 찾은듯한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81년생 나의 일상은 극장의

불이 켜진 순간 다시 시작되어

맥주 한 잔 하자는 후배의 청을 뒤로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살배기 딸아이는 엄마~하며

뛰어나와 나를 맞았고

나의 엄마는 오늘도 딸의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소진된 모습으로 앉아계셨다.

이 영화를 엄마와 함께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아마 그랬다면 둘이 엉망진창으로 울고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섰을 것 같다.

나는 나의 딸이 이런 영화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같은 영화를 보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극장을 나서던 남성 관객들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의 엄마가 그렇게 살았으므로

나 역시 이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며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시키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를 두고 페미 영화라는 평가를

내린 사람들이 솔직히 처음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딸을 위해서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있다면 그런 면에서는 다소간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