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내내 속이 더부룩하고 복통으로 자다 깨는 새벽을 맞는 일이 하루 걸러 한 번씩이다. 처방받은 장염 약을 먹어도 도통 낫지를 않으니 큰 병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하고 30대 중반이 되면 받아야 한다던 미뤄둔 대장내시경을 받아야 할 신호인가 싶어 내시경 전문 병원을 찾았다. 근데 신체나이, 너 참 정확하다!
내시경을 할 수 있는 가장 이른 날짜인 다음 주 목요일 2시로 예약을 하니, 간호사님이 내시경 전에 먹을 약과 안내 종이를 들고 왔다. 검사에 앞서 검사 전날 무엇을 복용해야 하는지, 또 피해야 할 음식들은 무엇인지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설명을 해주셨다. 식이조절에 대한 안내를 마치고 주의사항 중 ‘보호자 동반’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을 띄우려 할 때 내가 먼저 선수 쳤다.
'다른 지침들은 할 수 있는데, 보호자는 없어서요.'
'보호자가 없으세요? 수면검사라서 오후에 하게 될 경우 보호자를 동반해야 해요.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친구라도 괜찮아요.'
간호사님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고, 내가 반문했다.
'그 시간엔 다들 일을 하고 있어서요. 보호자가 꼭 필요한가요?'
병원에선 통상 대장내시경은 검사 시간도 길고 약이 깨지 않은 상태로 혼자 귀가하게 되면 사고가 날 수 있어 반드시 보호자를 동반해야 한다고 했다. 단호하게 그건 어려울 거 같다고 다시 말씀드리니,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으면 검사가 안 될 수 있어 최대한 구해보라고 하셨다. 그 시간에 일하는 엄마나 오빠에게 수술도 아니고 내 몸 챙기는 내시경 검사한다고 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이다. 가족도 그런데 친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병원을 나서는 길에 간호사님이 한 번 더 말했다.
'한송이 님, 보호자는 꼭 알아보세요!'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평일 낮에 고작 내시경 검사하는데, 모든 사람이 보호자를 동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목요일 2시에 나는 당연히 혼자 갈 것이다. 현재의 나는 나의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병원을 나서며 30년 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상상을 했다.
간호사님이 파리해진 내 손을 잡으며,
'한송이 할머니, 다음번엔 보호자와 꼭 함께 오세요.'
지난주엔 홀로 제주 여행에 다녀왔다. 2014년 베를린 여행을 다녀온 이후 5년 만에야 혼자 하는 여행이라 벅찼다.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이라 올레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참이었다. 여행 둘째 날 아침 숙소에서 콜택시를 불러 탔다.
'기사님, 올레 1길 시흥초등학교 앞으로 가주세요.'
'여자 혼자 올레길에 가려고? 거기 살인사건도 났을 걸 아마. 여자 혼자 올레길 가는 건 안 좋아. 오름 같은 데면 몰라도….'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가면 다른 사람들도 있겠죠.'
'일행이 있어도 무서운 거야. 사람은 어디서 어떤 맘을 품을지 몰라서 사람이 제일 무서워.'
기사님의 걱정스러운 말이 계속되었다.
재차 조심해서 가겠다고 하고 말을 끝내려던 찰나 제주도에 혼자 왔냐고. 보아하니 결혼해야 할 나이 같은데 남자 친구는 있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네’ 하며 얼버무리니 요즘 젊은 사람들 결혼도 안 하려고 하고 애도 안 낳으려고 하는데 늙으면 얼마나 외로운지 모른다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 없는 익숙한 패턴으로 흘러갔다.
올레길에서 세찬 제주 바람을 맞으며 걷는 동안 생각했다.
그러게. 늙으면, 아프게 되면, 나는 어쩌나….
나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사는 동네 친구가 두 명 있고, 30분 거리에 사는 남자 친구가 있다. 내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보고 싶을 때 자주 만날 수 있는 지금이 딱 좋다. 하지만 앞으로도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내게 있어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가족이든 사랑이든 건강이든 물질이든. 이 불안은 이따금 선명해진다.
그런데도 미래의 나를 위해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그렇다. (하지만 내 의지 포함 세상에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안다.)
잘 살기 위해선 나를 지탱하는데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 마음의 의연함과 유연한 사고, 무엇보다 강인한 체력까지. 결혼하거나 자녀를 낳아 삶의 외연을 확장하지 않으면 (나는 괜찮고, 만족하더라도) 여기저기서 함부로 내 삶을 깎아내리곤 한다. 어떤 부분에선 내 경험이 부족할 순 있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태어났으니깐. 내가 닿을 수 있는 범위에서 삶을 일구고 어떨 땐 망치기도 하며 용기 있게 살고자 한다. 만약 30년 후에도 보호자가 없을 때 오늘을 기억하며 웃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