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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ug 31. 2023

[안나의 습작노트] 2. 당신에게

그러니까, 첫사랑

 

 당신에게



 안녕, 당신. 잘 지내고 있나요? 


 중국의 한 대학교에서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어요. 당신, 현역 연주자로 활동할 때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보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그랬던 당신이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진심으로 기뻤어요.

 

 지금도 강남역에 가면, 당신과 강남 대로를 정처 없이 걸었던 그 밤이 떠올라요. 우리는 삶과 죽음, 우주와 고독 그리고 위대한 작곡가들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 나누고 공감했었죠.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당신에게 내가 느끼는 작곡가들을 설명하려고 썼던 방법 기억나요? 그 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치마를 입고 있던 것도 까맣게 잊고) 콘크리트 바닥 위에 날카로운 돌멩이로 x축과 y축을 그렸었죠. y축 위쪽에는 Transcendence(초월)을 아래쪽에는 Reality(현실)을 쓰고, x축 왼쪽에는 Light(가벼운)을 오른쪽에는 Deep(깊은)을 쓰고 서는

 

 "음 제가 생각하기에 쇼팽은 여기고, 모차르트는 여기. 브람스는 요기고요, 베토벤은 무조건 저기예요. 슈만과 슈베르트는 여기랑 여기고요.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여기 어디 즈음되는 거 같아요. 아, 말러는 당연히 여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라고, 내가 당신에게 물었을 때 당신 표정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쪼그리고 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신. 당신은 그때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어요.



 당신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었어요. 어떠한 의문도 주저함도 없이 내 입에서 그 말이 노래하듯 흘러나왔을 때,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벅차올랐었죠. 이런 감정을 알게 해 준 당신의 존재에 대해 무한한 감사함을 느꼈고 식상하지만 정말,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어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는 기분이 뭔 지 알 거 같았어요. 당신을 위해서 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면, 당신 믿어 줄 거예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어느 햇살 좋은 날, 당신은 지구 반대편에서 전화를 걸어 내게 말했죠. 꽤 오랫동안 그 전화를 받았던 나 스스로를 얼마나 저주하고, 미워했는지 알아요? 간단, 명료했었죠. 당신의 이별 통보엔 이렇다 할 이유도, 납득할 만한 상황도 구차한 변명도 없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어쩌면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내가 무의식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던 그런 충동적이고 투명한 이별이었어요. 나는 어쩐지, 당신답다고 생각했어요. 믿을 수 없게도 나는 그런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다신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삼켰고, 이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나를 할퀴었죠. 그날 당신의 전화를 받고 서너 달 동안 죽은 사람처럼 살았던 거 같아요. 

 

 몇 달 후, 당신이 보낸 소포를 받았을 때 나는 번개에 맞은 것만 같았어요. 나는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그 소포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열어보지 못했답니다. 눈치 없이 다시 가슴이 뛰었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거든요. 마침내 열어본 소포 안에는 책 한 권이 들어 있었어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위대한 시인 릴케와 혼란스러운 젊은 시인 지망생 카푸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엮은 책이었죠. 책장을 몇 장 넘겼을 때 나는 깨달았어요. 당신이 보란 듯이 책 속에 릴케가 언급한 모든 ‘고독’에 빠짐없이 밑줄을 그어 놓았다는 것을.


 

 “당신은 분명히 좋은 작가가 될 거야.” 


 강남 대로를 같이 걷던 그 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을 때 당신은 마치 정답을 적듯이 내게 말했었죠. 내가 주저하며 고백했던 내 안의 ‘고독’이 바로, 내 글의 원천이 될 거라고 말해주던 당신의 확신에 찬 눈빛도 기억났어요. 내 안에서 용기와 사명감이 솟아올랐어요. 그래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아주 외롭고 고단했어요. 꽤 막막하고 지루했으며 혼란스러웠죠.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답니다. 아마 당신 덕택이겠죠. 


 생계를 함께 꾸리느라 이 책을 완성하는데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네요. 그 긴 시간 동안 묵묵히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완성된 책을 이 편지와 함께 당신에게 보냅니다. 마침내, 당신을 향한 내 사랑도 결말을 맞이한 거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언제나 평안하고 행복하세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내 첫사랑 당신. 








2023.08.10

Photo l Mujer y clave © Francisco Ramírez Afinador de Pia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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