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오늘의 기분
여름을 만끽하고 싶은 기분
1. 여름의 시작점
포근한 니트와 카디건이 쌓여있던 옷장에 어느새 가벼운 옷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봄꽃이 불어왔던 화단에는 어느새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니 단번에 여름 냄새가 달려든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여름이 물씬 묻어났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반팔을 입었고, 또 다른 이가 입은 원피스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파도의 결처럼 일렁였다.
별 일 없는 하루가 모여서 달력의 한 페이지를 꽉 채우고, 그 한 달이 쌓여 계절을 하나씩 밀어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은 들뜬다. 생각해보면 매년 네 번의 날씨가 비슷한 주기로 바뀌는데, 사람들은 항상 계절의 시작점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단풍으로 물들고 다시 떨어지는 그 단조로운 사계절의 변주를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설렘을 가득 담은 눈망울의 어린아이처럼 관람한다. 처음인 것 같은 살가운 반가움으로 계절을 마중 간다. 그건 아마도 계절은 공짜라서가 아닐까. 연료를 채워야만 달리는 기차처럼 세상 모든 것들은 기브 앤 테이크로 이뤄져 있다. 사랑도, 일도, 친구와 나누는 한 마디의 위로도 그렇다.
하지만 지구 상 모두가 그렇듯 계절은 언제나 무해하고 너그럽다.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풍요로운 생명력을 나눠준다. 사계절이라 참 다행이다. 일 년에 네 번의 공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으니까.
2. 바깥은 여름
글을 정리하고 보니 이미 바깥은 여름이다. 부쩍 무더워진 날씨에 맞춰 짧은 청반바지와 통풍이 잘되는 셔츠를 입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입구가 바로 내천과 이어져 있어 덕분에 출근길이 푸릇푸릇하다. 회색 매연의 시끄러운 4차선을 마주 보다가 풍채 좋은 나무 그늘을 벗 삼아 걸으니 나도 모르게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탁탁탁 조깅을 하는 사람들의 리듬과 여름 바람을 맞으며 내달리는 자전거 풍경이 참 조화롭게 예쁘다.
내천길을 걷다 보면 정겨운 이웃이 그곳에 있다. 삼삼오오 모여서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몸빼바지 입고 나물을 뜯는 아주머니들, 작은 과일 트럭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파트 사람들. 고양이는 우리의 이웃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귀여운 현수막까지. 잊고 지냈던 사람 사는 모습. 동네의 전형적인 푸근함. 여름 냄새가 가득하고 정겨운 그 길이 나는 참 좋다.
내천길을 10분 정도 걸으니 땀이 슬슬 쏟아진다. 나무 그늘도 뜨거운 오후의 햇살을 견뎌내기 버거운 모양이다. 후끈해진 걸음걸이에 새삼 여름이 실감 났다. 8월을 생각하니 조금 아찔해졌다. 터벅터벅 더위에 지쳐 걷는 내 앞으로 자전거 한 대가 쓩 지나간다.
집 보러 올 때가 생각난다.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로 들어오는 길목에 내천길 만개한 벚꽃들이 마중을 나왔었지. 출퇴근 길이 이토록 계절스럽다니! 우리는 계절이 듬뿍 담긴 길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사계절을 흠뻑 즐길 수 있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집을 결정하기 충분했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지금 그 결정에 한 점 후회도 없다.
3. 계절은 시끄럽다
오전 11시. 서점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밤새 후끈해진 열기에 책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서둘러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동시에 에어컨 냉방을 켰다. 걸어오느라 후끈해진 몸의 온도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차가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몸에 밴 여름이 금세 씻겨나간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1시부터 저녁 8시까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하는 나에게 출퇴근 길을 제외하고 여름을 느낄 새가 없다. 백화점에서 일한 친구가 말했다. 유리창이 없는 공간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계절감을 상실하는 일이라고. 밖에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는다고. 때론 그런 공간에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삶의 경계가 흐려진다고.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띵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청량함이 쏟아지고, 가을의 바스락 소리가 들려오고, 겨울 입김의 따뜻함이 없다니. 많은 이들이 계절을 놓치며 산다. 사계절을 온전히 즐기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구나. 그때부터 출근길의 계절을 꼼꼼히 즐기려고 노력한다. 제철 과일처럼 계절에도 제철의 향과 모습이 있다. 똑같아 보이는 풍경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매일이 다르다.
비가 온 날은 시끄럽게 갈증을 해소하는 나무들이 있고, 습기 많은 땡볕에는 간신히 숨을 쉬는 아이들이 있다.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가로수 밑은 기분 좋은 콧노래가 흐른다. 눈으로, 코로, 손으로 여름을 흠뻑 느끼며 돌아가다 보면 계절을 놓치며 살던 바빴던 지난날이 아쉬워진다.
오늘부터라도 부지런히 계절의 순간을 놓치지 말자.
오늘의 계절은 오늘뿐이니까.
키만소리 (김한솔이)
2년간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를 만들었다.
여행자에서 이제는 작가와 글방 에디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제3회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를 출간했다.
세계 여행하면서 받은 엄마의 메일을 엮어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를 출간했다.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쓰며 활발히 연재 중이다.
인스타그램 @ki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