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12월
유난히 길었던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급히 찾아왔다. 늦게 온 추위에도 태연스럽지 못하게 감기에 걸려서 며칠 앓다 정신을 차리니 올해가 일주일 남짓 남았다. 예년같으면 감성에 한참 젖어 여행 계획이나 세웠겠지만, 바쁘면 이마저도 사치인걸 알았다. 왜 마음이 분주한지, 왜 몸이 바쁜지 모른 채 연말을 맞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교직원의 몇 안되는 베넷핏인 단축근무이다. 1시간 단축이지만, 그 시간을 출근과 퇴근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이불 밖으로 나오는게 유난히 어려운 요즘은 저녁 약속이 없으면 여유를 부리며 10시까지 학교로 간다. 느긋하게 출근하니 행정실에서 ‘연차 유급 휴가 사용 촉진 안내의 건’이라는 제목으로 공문이 와있다. 남은 연차는 열흘이나 되는데, 아직도 휴식의 결심을 못했다. 마음이 갑갑해졌다. 일은 내가 쉬나 안 쉬나 계속 생길 것이다. 생기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일의 완결을 조금 지연시켜도 세상은 망하지 않을 걸 잘 안다. 혹은 이런 고민을 하며 불평을 늘어놓을 시간에 어서 일을 하면 조금 더 여유가 생길 수도 있다. 근데 난 왜 이 생각을 끝내지 못하는가 한숨을 쉰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지독한 워커홀릭 유전자 때문에 나는 연차 부자가 된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부모님은 일만큼 여행에도 진심이셨다. 연말이 되면 우리 가족은 강원도로 떠났다. 매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38선 휴게소의 곰돌이를 보러 갔다. 각각 파란 옷과 빨간 옷을 입은 곰돌이 커플이 38선 휴게소 현판을 들고 있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내가 곰돌이 배에서 어깨까지 자라는 동안 그랬다. 더운 여름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추운 강원도 산길을 차를 세 번이나 바꾸는 동안 몇 번이고 오른 것을 생각하면 여행이 아니라 인증샷에 진심이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인증. 올해가 힘들었던 이유는 횟수로 30년을 살아서도 아니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아닌 듯하다. 날 괴롭힌 것은 ‘서른’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어른’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인증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제 서른이라면 응당 어른의 면모를 갖추었어야 하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에 달고 다닌 말이 있다.
야 이제 우리도 서른인데...
그만 싸워야지. 그만 어리광부려야지. 그만 미련을 버려야지. 더 행복해야지. 더 나아가야지. 더 덤덤해야지. 스스로 되뇌이는 말들이 입 밖으로는 “야 이제 우리도 서른인데”라는 말 뒤에 말줄임표가 되어 숨어버렸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비웃음 아닌 부러움으로 “맞아, 고작 서른인데 다 해봐.”라고 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귀를 막으며 “서른이어도 변하지마.”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영점을 다시 맞추고 있었다. ‘아.. 이 옷은 조금 애 같았구나.’, ‘이런 태도는 너무 건방졌네.’하며 조금 어른스럽기도, 다시 조금 어린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보여주지 못한 진심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분주했다. 끝나가는 한 해의 나날들 속에서 시험시간이 부족한 수험생처럼 조바심이 났다.
원래 실수는 이럴 때 나는 법이다. 이럴 때 나는 루틴을 찾는다. 매일 해오던 것과 매년 해오던 것을 한다면 중간은 가겠지. 크리스마스에는 인천에 있는 보육원으로 봉사를 갔다. 사람들을 모아 다니는 교회에서 결연하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 크리스마스를 재미있게 보내도록 선물도 주고 활동을 짜서 놀다가 온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여름부터 다시 아이들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환경은 풀렸는데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지난 여름도 갔다가 예상보다 반나절이나 빨리 돌아온 탓에 유독 함께 갈 사람들을 모으는게 힘들었다. 여러 날을 모여 들뜬 마음으로 준비하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또 한 번 마음이 모여지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속상한 마음을 애써 과거에 대한 감사로 덮었다. 스무 명이 함께 가지만 그 중 미혼 청년은 고작 4명이었다. 그마저도 방문 일주일 전에야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모일 강당의 데코레이션과 레크레이션을 맡았다. 준비물을 사기 위해 파티용품점을 찾았다. ‘연말파티를 위한 이벤트 세일’이 있었어서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연말파티라... 연말에 왜 즐거웠더라.’ 분명 나도 연말이면 주말이 꽉 차게 약속이 있었다. 왜 그렇게 즐거웠을까? 함께 연말을 보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내 곁에 없다. 연말을 함께 보내며 그 다음 해를 준비할 때 우리는 분명 이별을 준비할 마음이 없었다. 다가올 새로운 한 해 또한 함께할 사람이란 생각에 즐거운 안녕을 고할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곁에 남지 않을 사람인걸 알았다면 그 때 우린 즐겁지 못했을까? 아니다. 정직하게 생각해본다면 그 시간의 나도 얼핏 알았을 것이다. 알지 못함에도 불안했을 것이다. 내게 있던 일말의 아련한 마음이 거기에서 왔을 것이다. 그때의 즐거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즐거움이었겠다. 그래도 좋았던 사람들. 그래도 좋았던 시간들. 갑자기 힘이 솟았다. 이번에도 그런 연말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말의 의지가 생겼다.
파티용품도 나날이 발전한다. 유행했던 반짝이 가랜드도 이제는 한물가고 요즘에는 풍선으로 가랜드를 만든다. 일정 간격으로 구멍이 뚫린 얇은 플라스틱 스트랩에 동그란 풍선을 제각각의 크기로 불어 끼운다. 그럼 마치 뭉게구름 같은 모양이 된다. 핫한 것은 또 해봐야지. 풍선 가랜드 세트를 사고, 여분의 풍선도 크리스마스 색에 맞춰 빨간색, 초록색, 금색, 흰색으로 골라 샀다. 너비가 두꺼운 스트리머도 같은 색으로 산다. 먼저 그려보는 공간과 아이들하고 어우러질 현장의 모습에 나에게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갑자기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역시 매년 해오던 것을 선택한 것은 나다운 감성을 찾아주었다. 일과 중과 퇴근 후에도 열심히 레크레이션을 짜고, 물품 구매를 했다. 필요한 것들이 더 있는지 자꾸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확인하고 고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지만 쌓인 일과들은 나의 마음 따위나 사정을 봐주지 않는 법이다. 진작에 끝냈다고 생각하던 크리스마스 특별 영상 작업의 수정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결국엔 마지막 금요일까지 끝내지 못한 작업에 반차라는 카드를 썼다. 사유는 보육원 봉사활동으로 보고했다. 사실 사유는 쓰지 않아도 되지만 날 찾을 누군가에게 이 사유는 클 것 같았다. 일반 직장이면 TMI로 치부되었겠지만 신학교에 다니는 장점은 이런 사적인 사유가 용인된다는 것이다. 사회 혹은 교회를 향한 선행과 헌신은 소위 말하는 까방권을 획득한다. 반차를 권유한 본관의 선생님들도 말씀하셨다. “그냥 가. 이럴 때 손을 탁 털고 놓고 가기도 해야지. 이미 충분해.” 분명 작업한 영상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맞다. 손을 탁 털고 반차를 내니 몇 주를 괴롭힌 수정작업은 끝났다.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완벽을 내려놓으니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었다.
이른 퇴근 후 친구를 불러 번화가에 있는 맛집의 라멘을 먹었다. 짧게 끝나버린 친구의 연애 얘기도 들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적으면 20대, 우리보다 나이가 많으면 30대인게 웃겼다. 나이로는 고작 한 두 살 차이인데, ‘하여튼 20대 때는...’이라고 말하고, ‘역시 30대라...’라는 말이 나온다. 마음을 간지럽히는 양심 혹은 진실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수다를 위해 잠시 모른 척 했다. 빌런이 되어 준 친구의 전 남자친구 덕분에 여유가 생긴 친구는 이 후에도 봉사 준비를 도와주었다. 행운권 상품을 사고 작은 선물들을 포장하면서 남은 이야기를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출발은 7시 50분인데 나는 6시 반에 집을 나섰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짐을 싸는데 DSLR 카메라 충전기를 학교 스튜디오에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학교는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함께 가기로 한 교회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혹시 광나루 지나니?” 다행히 동생이 운전해오는 차가 광나루를 지난다기에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다.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급하게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했다. 스튜디오에 있던 젤리와 사탕 몇 봉지도 패딩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교회에 도착해 준비한 것들을 차에 나눠 싣고 아이들이 살고 있는 보육원에 도착했다. 준비한 데코레이션을 하고 코너를 준비했다. 즉석 인화기도 꺼내 포토월도 만들었다. 미취학 아동부터 19살 보호종료 전까지 아이들의 집이다. 모여있는 아이들의 눈동자의 수보다 더 많은 사연으로 가족이 되었다. “선생님 물어볼게 있는데요. 선생님은 왜 이렇게 예뻐요?” 내가 처음 이름을 물어본 눈이 예쁜 여자아이는 나의 기쁨을 안다는 듯이 예쁜 말을 해주고 자기 주머니에서 꼬깃한 텐텐을 주었다. 전에 갔던 아동임시보호센터보다는 제법 호스트답게, 집주인답게 우리를 맞이 해주었다. 자신들의 공간을 내어주고, 우리가 들고 온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나는 레크레이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카메라로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즉석에서 인화해 포토월을 꾸몄다. 내가 든 카메라 앞에서 아이들은 점점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학생 여자아이가 다가와 내게 카메라를 써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흔쾌히 내주고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촬영하게 했다. 수십 분이 지난 후 꺼진 카메라를 들고 다시 내게 갖다 주며 물었다. “선생님, 이건 비싸요?”, “응. 한 이삼백 만원하지?”라고 대답하니 우와 소리를 내면서 내 손 안에 있는 카메라를 빤히 보았다. “저도 이런 거 가지고 싶어요. 이걸로 사진도 찍고 하고 싶어요.” 나는 그런 아이의 눈빛을 쳐다보았다. “이거 있으면 되게 좋지. 있잖아, 나는 영화과를 나왔거든? 학교 가니까 이런 거 공부하라고 그냥 빌려주더라. 다른 학교는 동아리만 들어도 빌려주고. 응? 이거 하고 싶으면 이거 공부하는 학교 가라.” 진짜 그랬다. 나도 카메라가 너무 만지고 싶어서 교회에서 수련회를 하고 놀러가면 찍사를 자처했다. 그럼 나는 공짜로 하루 동안 카메라를 빌려 쓰는 것이다. 그렇게 대학에 갔고 그렇게 취업을 했다. 사줄 수도 내줄 수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화였다.
점심을 먹고 레크레이션 시간이 되었다. 31개의 행운권 번호와 30개의 꽝이 적힌 플라스틱 공을 준비했다. 점수 대신 공을 주는 것이 큰 규칙이었다. 처음에는 ‘단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으로 시작했다. 모두가 아는대로 술래가 뒤돌았을 때 멈추지 않으면 탈락이다. 이 게임은 내가 대학교에서 간 스무 살 첫 엠티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한 게임이라 능숙하게 진행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여리디 여린 아이들을 간과했다. 아이들은 이 작은 게임 탈락에도 쉽게 상처받았다. 라운드를 추가하고 추가해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들어했다. 게임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몇 명이 보이지 않았다. 복도로 가보니 게임 탈락의 억울함과 서운함으로 중학생 남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옆에서 달래주는 목사님을 보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다시 보니 아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대하며 가장 좋은 옷으로 입고 나왔을까? 준비된 게임은 모두 경쟁해서 공을 성취하는 것인데, 내 생각이 깊지 못했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쉬운 것은 상처받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포기하는 것도 쉬웠다. 자신에게 자신 없는 것은 “망했어” 한 마디로 포기해버렸다. 양팀의 점수가 10대 1이 될 지경이었다.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규칙을 바꾸고 게임을 추가해가며 주어진 시간과 선물을 모두 사용했다. 대망의 행운권 추첨으로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는데 6살 꼬마아이가 와서 32번 선물을 달라며 왔다. 그런데 쪽지를 잃어버렸다면서 내 옷깃을 잡고 나를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선물이 너무 가지고 싶은 마음에 없는 32번을 만든 기발함에 놀랐다. 나는 아침에 욱여넣었던 사탕 몇 봉지를 쥐어주며 꼬마에게 말했다. “어쩌지? 선생님이 선물 쪽지는 31까지만 준비했는데? 32번 선물은 없어. 이 사탕이라도 줄게.” 꼬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다른 봉사자 선생님이 와서 꼬마가 울고 있는 것을 알려주며 정말 꼬마에게 32번 쪽지가 있었고, 그걸 식당에서 잃어버린 것을 전해주셨다. 마음이 순식간에 불안해져 함께 행운권을 만든 전도사님을 찾아가 혹시 몇 개의 쪽지를 만들었냐고 물었다. “32까지 만들었어요. 4칸으로 만드느라.” 그 꼬마가 맞았고, 내가 틀렸던 것이다. 아이를 찾아 안아주고 달래주어도 정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주머니 안에 사탕 몇 봉지뿐이었다.
오늘 내가 만난 아이들은 내가 선물을 줬다고 생각할까, 선물을 뺏었다고 생각할까?
돌아오는 길은 서울의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한강을 따라 달렸다. 노을이 지는 한강을 보며 생각했다. 왠지 앉아서 울고 싶어지는 광경이었다. 차에 함께 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멀리 들렸다. 복잡해지는 생각에 혼자서 마음을 다잡았다. 산타는 없지만 울면 안 돼. 이 한 해가 끝나가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