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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의 서른 Mar 06. 2023

[20대]행복이라는 종착지로의 여정

현재의 1월


사람이 미래를 꿈꿔야 하는데, 나는 나의 과거인 20대를 자주 회상하곤 한다. 앞으로 행복할 일이 더 많아야 할 텐데 그때가 가장 행복했고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빛났던 순간으로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류의 행복이랄까. 그래서 이번 주제에서 나의 행복했던, 평탄하지만 또 나름대로는 다이나믹했던 20대의 썰을 풀 생각에 근질근질하다. 


일단 20대니까 스무 살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보도록 하자. 스무 살이 된 나. 대학교 입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나 스스로의 목표 자체도 높았지만, 주변의 기대치도 높았었는데, 수시에 모두 떨어지고 정시로 가장 마지노선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재수 권유를 많이 받기도 하였지만, 공부를 1년 더 하기도 싫었고, 재수한다고 해서 성공할 보장도 없는 그 불확실성에 배팅하기가 싫어 생각지도 못한 학교, 생각지도 못한 과로 진학하게 된다. 몇 년간 목표로 한 대학이 있었기에 허무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나는 목표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크지 않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빨리 순응하는 편이거나 또는 회피하는 성향이거나.


다행히도 생각지도 못하게 진학하게 된 그 과는 생각보다 나의 성향과 잘 맞아서 또 금방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나의 새내기 시절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학 생활 다운 대학생활이었다. 밴드 동아리에 들어 기타를 처음 배워보았고, 공연도 했다. 밴드 활동 외에도 사진 학회, 정치외교연합동아리, 기숙사 활동 등등 많은 것을 했었다. 이렇듯 고향에서 태어나 한 지방에만 20년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처음으로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된 스무 살이었다.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외국인기숙사에 살았는데, 당시 룸메이트가 루마니아에서 온 친구였고, 그 친구 덕에 로망이었던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기도 했었다. 


보통 1학년 때는 막 놀아야 된다고 하던데, 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는 와중에도 학점도 열심히 챙겼다. 뺀질거리긴 해도 모범생 기질이 있달까? 수업 열심히 듣고, 과제도 열심히 하고, 시험 기간에는 시험공부도 열심히 하고. 벌써 대학 생활이 10년 전의 일이 되어버리니 가물가물해져서 오랜만에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4000원을 내고 성적증명서를 떼어보았다. (이렇게까지?) 1학년 학기 성적이 4.3 만점에 4.15, 2학기가 4.057. 지금 보니 A-가 1학년 내내 제일 낮은 학점이다. 올에이쁠은 아니더라도 올에이! 오~ 스무 살의 현재 이 자식, 쫌 하는데? 열심히 살았구나! 너! 웃긴 점은 보통 1학년 때 노느라 학점이 제일 낮고 갈수록 정신차려서 학점이 높아진다는데 나는 1학년 때가 제일 학점이 좋다. 아무래도 4학년 때는 다들 열심히 하니까 그냥 하던 대로 공부하던 내가 밀린 게 아닐까 싶다. 복수전공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1, 2학년 때 높은 학점 덕에 3, 4학년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이렇게 자기 자랑을 실컷 늘어놓고 나니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하고 과거의 영광에 젖은 사람 같다. (맞다) 하지만 인제 와서 이 소수점 자리 숫자에 불과한 학점이 다 무슨 소용이랴~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서 뿌듯하다. 과거의 현재야 고생했다!


이렇게 한 페이지짜리 성적표에 나의 4년간의 대학 생활이 정리되니 기분이 묘하다. 복수전공을 하면서도 꼭 한 학기에 하나는 꿀이라는 1학점짜리 스포츠를 넣어 승마, 스노우보드, 요트, 수상스키, 윈드서핑 학교에서 해볼 수 있었던 다양한 스포츠들을 배울 수 있었다. 진짜 재밌었는데. 그 중에서 나는 요트가 가장 좋았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3학년 3학기에는 리투아니아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기도 했다. 3학년 여름방학인 7월 초에 튀르키예로 떠나 그리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바로 리투아니아로 가서 학기가 끝난 뒤에는 유럽 여행을 하고 겨울방학인 2월에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친구 중에는 교환학생을 1년 동안 다녀온 것으로 착각한 친구도 많고 휴학을 했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많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휴학 좀 해볼걸 하는 아쉬움도 살짝 들지만, 4년 동안 알차게 놀았던 것 같아서 후회는 없다. 


대학교 4년,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는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다 해봤던 시기다. 연애도 해봤고,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여행도 원 없이 다녔다. “여행 어디 어디 다니셨어요?”라고 나에게 물어보면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약 30개국을 다 나열할 수는 없잖아요! 문제는 그렇게 여행도 많이 다니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채 4학년이 끝나버렸다. 다만 하기 싫은 건 명확했다. 4학년에 다들 취업 준비를 한다는데 일단 취업을 하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노답, 답이 없는 아주 철없는 생각이다. 그때까지는 학생 신분으로 그냥 주어진 공부를 하는 느낌에 가까웠는데 갑자기 나에게 선택권을 주니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차라리 누가 정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보니 취업 준비 자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더라. 


그러다가 도피성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로스쿨이다. 내가 도피성으로 선택했다는 걸 알고 친구 중에 한 명은 크게 놀라기도 했다. ‘변호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하고. 로스쿨 진학을 선택하게 된 것은 ‘변호사가 되어야지!’라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게 컸다. 나름 어렸을 때는 법조인의 꿈이랄까, 로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잊고 있었던 나의 고이 접어놓았던 꿈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법은 우리 사회를 규율하는 질서이니까 한 번 배워보는 것도 나쁠 건 없잖아?’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로스쿨로의 진학을 도전한 것 같다. 그런 것치고는 꽃같은 20대의 3년이라는 긴 시간의 청춘과 학비를 투자해야하는 인생에 있어 큰 선택이었지만. 그리고 그동안 나를 객관적으로 보건대 나는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또 그동안 해온 게 공부밖에 없는 데다가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공부로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스쿨 입학은 어디 쉽냔 말이지. 로스쿨 입시에 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내게 선택할 길은 학원뿐이었고 당시 로스쿨 입시학원은 독점에 가까워서 또 학원에 많은 돈을 투자해야 했다. 4학년 1학기 때 로스쿨 입시학원에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갔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내 대답이 가관이었는데, “내년에 다시 올게요~!” 이랬던 것. 제대로 준비해도 될까 말까인데 아직 그때까지는 이 냉혹한 사회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고 마냥 해맑았던 것 같다. 24살 여름에 도 인재육성재단에서 지원하는 글로벌탐방장학생에 선정되어 미국을 가기로 했는데 7월에 있는 로스쿨 입시시험인 LEET와의 경쟁에서 미국여행이 이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부모님과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다녀왔고, 2016년 2월에 정식으로 졸업한 뒤에나 1년 만에 다시 학원에 찾아갔다. 그리고 24살,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로스쿨 입시를 준비했다. 


4년간 살았던 정든 대학가를 떠나 학원이 있는 신촌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으로 오피스텔에 살았는데, 집을 보러 다닐 때 첫눈에 반한 곳이었다. 시설도 너무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좋았고, 무엇보다 위치가 너무 좋았다. 어차피 1년만 살 거니까 하며 그곳으로 선택했는데, 너무 만족스러웠다. 번화가에서 사니까 친구들 부르기도 좋고, 학원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보는 버스킹도 운치 있었다. 주말이면 플리마켓도 열리고 축제도 하더라. 멀리 가지 않아도 집 주변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맛집도 많고, 현대백화점 지하식품코너에서 떨이하는 음식들을 사기도 하고. 그리고 공부하다가 답답한 날에는 한강이 가까워서 한강까지 자전거 타며 힐링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간의 신촌 라이프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혼자 막연하게 로스쿨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는데(줄여서 로준생이라고들 한다), 학원에서 같은 꿈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 것도 좋았다. 당시 학원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는 아직까지 인연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에 한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소에 해볼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은 경험이었다. 신촌에서 교대로 2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당시 처음으로 하는 사회생활, 그리고 출퇴근이었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즐거웠던 기분이 생생하다. 




7월에 있었던 LEET 시험에서 합격권의 점수를 받았고, 자기소개서, 논술, 면접의 관문을 거치고 나서야 로스쿨에 합격했다. 로스쿨 입시에서는 총 두 군데를 지원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상향, 하나는 안정으로 지원했다. 대학 입시 때처럼 세 군데를 지원할 수 있었다면 상향 적정 안정으로 넣으면 딱 맞았을 텐데, 두 군데밖에 지원할 수가 없으니 이게 참 애매했다. 나는 대학 입시에 이어 이때도 재수는 하기 싫었다. (뭐 누군 재수가 좋아서 하나 싶긴 하지만.) 상향인 학교도 면접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안정으로 지원한 학교만 합격하게 되었다. 당시 외할머니와 엄마랑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공항철도에서 합격 소식을 알게 되어 엄마에게 “엄마~! 나 합격했어~” 라고 말한 기억이 생생하다. 더 원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합격은 기쁜 거니까. 


단조로운 일상을 가진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로스쿨에서의 3년은 정말 다이나믹한 3년이었다. 다들 ‘학생 때가 제일 좋지’라고 말하지만, 로스쿨생은 여기서 말하는 학생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그래서인지 처음 취업하고 나서도 힘들다기보다는, ‘학생 때는 돈을 내고도 고통을 받는데 저녁 시간도 보장되면서 돈을 받을 수 있단 말이야?’하며 기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분도 얼마 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최악을 맛봐서 그런지 지금이 더 낫다. 로스쿨 생활에서 힘든 일만 있었던 건 아니고, 돌이켜보면 즐거운 기억도 나름 많지만, 일단 어쨌든 그 때의 본업은 공부였는데, 공부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절대적인 공부량이 많아야 하다보니, 하루의 시간을 쪼개 공부시간을 확보해야 했고, 밥 먹는 것 운동하는 것 자는 것 뭐 하나 편하게 할 수가 없었다. 늘 쫓기는 기분이 들어 늘 한숨을 달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잠이 엄청 중요해서 고등학교, 대학교 통틀어 밤을 새본 적이 별로 없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다보니까 로스쿨에서는 밤을 여러번 새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시험 범위가 정해져있으니 그마저도 양이 방대하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1학년은 뭘 믿고 선행학습도 안 하고 입학한 탓에 시행착오를 거치며 공부방법을 찾아갔었다. 평생 공부만 했다고는 하지만 법 공부는 또 다르더라. 지금은 변호사시험에서 한글법전을 배부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자법전을 이용했기 때문에 한자 공부까지하며 걸음마부터 시작한 법학공부였다. 다들 공부 좀 한 가닥 한다는 사람들끼리 모여있어서인지 정말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1학년 1학기에 제일 중요하다는 계약법에서 C-를 받지를 않나 학부 때는 당연했던 A도 단 하나도 받지 못했다. 1학년 2학기 시험 끝나고는 엄마랑 근교에서 바람 쐬러 갔다가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해 얘기 나누다가 마침 근처에 사주 천막이 있길래 즉흥적으로 들어가 사주까지 봤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적응이 되었는지 2학기 시험은 제발 A 하나라도 받아보자가 목표였는데 뜻밖에 A+이 두 개나 떠서 계속 다니게 되었지만.


로스쿨 3년을 다니고 졸업하고 나니 29살이었다. 입학한 2017년에 25살은 참 어렸고 해맑았던 것 같은데 졸업하고 나니 20대 후반이라니. 2020년 1월에 변호사시험을 봤고, 2월에 졸업을 했고 4월에 합격 발표가 났다. 변호사시험을 보고 합격 발표가 나기까지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꽤나 길다. 원래는 몽골 여행을 가려고 했었는데, 코로나가 터져 비자도 반려당하고 하늘길도 막혀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본가인 제주도에서 부모님과 지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인생에서 행복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단 시험이 끝났으니 공부로부터의 해방이다! 언제 공부를 열심히 했었냐는 듯 한량같은 하루하루였다. 아무래도 천성이 베짱이인 듯.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시국이었고 밤이 되면 불합격에 대한 불안감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공복 유산소로 산책을 나가고 돌아오면 엄마가 준비해놓은 코끼리가 먹어도 될 만큼의 푸짐한 샐러드를 먹고 오후에는 엄마랑 카페나 근처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은 변호사 시험 불합격으로 인해 깨져버리게 되었다. 내심 당연히 합격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충격이 꽤나 컸다. 대학교 입시나 로스쿨 입시는 원하는 학교는 아니었을지라도 차선의 학교라도 합격했는데, 이건 뭐 합격 아니면 불합격이라니. 로준생 시절까지 합하면 4년 간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변호사 시험 재수도 대학교 입시, 로스쿨 입시 때도 그러했듯 당연히 하기 싫었지만, 뭐 별 수 있나. 코로나 시국이기도 하고 변호사 자격 없이 처음 하는 취업 준비가 너무 막막해서 그냥 하던 공부를 한 번 더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29살 5월부터는 고시생의 신분으로 시험을 다시 준비했다. 그때도 명확한 꿈보다는 회피적으로 공부했었기 때문일까, 결과는 좋지 않은 채 20대를 마무리하게 되었지만. 


어느덧 30대.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로스쿨 입시를 준비했고, 로스쿨에 들어와서는 학교 정독실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기 때문에 나의 정신 상태는 그냥 학생에 머물러 있었는데, 일찍 취업한 친구들은 이미 사회 초년생티도 벗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아직 미성숙한 존재같았기에 약간의 자격지심이 있었고, 이러한 결핍 때문에 변호사고 뭐고 하루빨리 사회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는 모르겠지만, 늘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이 자리했었다. 그래서 한 번의 재수 끝에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다행히 지금은 퇴근과 주말과 휴일만을 기다리는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자리했다.


꿈꿔왔던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후회없는 20대를 살았다고 생각한다. 아쉬웠던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늘 나는 그 때의 최선의 선택을 했고 충분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20대를 거쳐 30대가 된 지금도 다 그런 과정 속의 결과이기에 만족스럽다. 그냥 욕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야망적이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 부모님은 좀 안타까워 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항상 중요한 때에 실패를 겪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탓에 내 안의 무기력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다 성장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렇게 꺾여 가면서도 또 살아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인생인 것 같다. 인생의 정답은 없고, 구조적으로 모두가 성공할 수도 없다. 각자가 겪은 경험과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살아나가는 것 아닐까. 이러한 20대의 과정을 겪은 지금에 와서는 그저 내가 “현재” 행복하기만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앞으로 30대의 나에게 바라는 것. 줏대있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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