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1월
또 한 해가 지났다. 인생선배들은 원래 서른보다 서른 하나에 성장통을 한 번씩 세게 앓는다고 했다. 몸도 급격하게 늙어가고 인식도 많이 바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요즘 거울을 볼 때 제일 고민은 불독살 같은 살 쳐짐이다. 그래도 또래보다는 어려보인다는 말을 들었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오히려 스트레스이기도 했는데 알게 모르게 진행된 노화는 이제 우기고 싶어도 우길 수 없게 세월의 흔적을 남겼다. ‘하긴, 내가 너무 20대처럼 놀았다. 관리를 안했네.’ 생각이 들어 수면팩이며 마사지기를 연초부터 잔뜩 사들였다. 누군가와 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도 어플에서 팔자주름을 열심히 없앤다. 옛날 사진을 보면 그때의 컨디션이 그리워진다. 그때는 내가 날씬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보니 그렇게 마르고 그렇게 탱탱할 수가 없다. 예쁠 때 예쁜 걸 몰랐다는 게 제일 분하고 억울하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해줄 수 있었을텐데 지금보다 더 심한 자괴감을 안고 살았다.
누가 다시 20살로 돌아갈 것이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각자의 대답이 다르겠지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전제하에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20대를 뒤돌아보면 불안했고, 우울했다. 나는 미숙했고, 경솔했고, 지나치게 많이 힘들어했다. 나는 스무살은 참 ‘영화’같았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을 처음 생각한 것은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고 나서이다. 드라마 감독으로 나오는 현빈과 송혜교의 러브스토리이다. 지금은 한국 시청자도 장르를 이해하는 폭이 깊어져서 특정 직업군의 이야기가 결국 로맨스로 이어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뭐든지 ‘꿈과 사랑의 이야기’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열광하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사세’는 이상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때부터 은연 중에 연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드라마를 본 이후로 학교 축제를 기획해본다거나, 교회에 이미 사라진 문학의 밤을 다시 부활시켜 연출해보기도 했다. 그 문학의 밤에 올린다고 뮤지컬 같은 대본도 썼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연극이었을텐데 당시는 반응이 뜨거웠다. 그치만 그래도 나는 내가 예체능을 전공할거란 생각은 못했다. 단지 노는 걸 좋아하는 청소년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원서를 써야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전공을 정하지 못해서 꿈이 없어서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용기를 못 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부모님의 권유로 집과 멀지 않은 대학 3곳을 고르고 설치된 학과 중 가고 싶은 곳에 원서를 냈다. 영화과, 청소년문화심리, 사회복지. 그렇게 3곳을 내놓고도 고민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기도했다. 제발 한 군데만 붙게 해달라고! 그렇지만 또 선택을 해야했고, 나는 제일 재미있어 보이는 것으로 선택했다.
영화과의 인상은 강렬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내향인은 살아남지 못할 외향인 리그였다. 나는 입학식 전에 하는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지 못했다. 주일이기도 했고, 원래 그런 비본질적인 행사에는 불참하는 편이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참여해 친분을 쌓은 채 입학식에 참여했다. 입학식에 가서 귀를 키워가며 들어보니 다른 동기들은 예고를 나왔거나 영화 입시학원을 거쳐 온 친구들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고등학교 내내 사교육은 일체 받지 않았다. 학원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예체능 입시학원이라면 보지도 못했었다. 나는 불안해졌다. 첫 날, 첫 대면부터 도태되는 기분이라니 견딜 수 없었다. 입학식 축하공연을 온 가수의 공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회자가 장기자랑을 제안했다. 상품은 한 달치 통학버스 티켓이었다. 걸어가도 30분, 시내버스로만 겨우 2정거장 떨어진 곳에 살던 나에게 정말 필요 없는 선물이었다. 그러나 무엇에 홀린 듯 손을 번쩍들고 앞으로 나갔다. 잘 부르는 노래가 있지도 않았기에 미친 척 MR이 준비되어 있을 바로 앞 순서에서 공연을 한 가수의 노래를 불렀다. 이 후 나온 수줍은 이름 모르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그 날 통학버스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동기와 선후배 사이에서 나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었다. 처음 시작이 이랬기 때문일까. 나는 스무살 내내 도태되지 않으려 열심히 살았다. 1학년 1학기 강의실 풍경을 되돌아보면 유치원에서 한글을 다 배웠는데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있어서 꾸역꾸역 ‘가나다라’를 다시 쓰는 모습이었다. 나만 정기 커리큘럼대로 공부하는 학생 같았다. 꾸역꾸역 힘을 내던 나는 첫 대학교 엠티를 가서 무너졌다. 군기가 센 영화과에서는 선배님이 말씀하실 때 손끝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세트장 집합이 걸리면 육두문자가 날라오는 환경적 폭력 앞에 노출되어야 했다. 그런 분위기에 작정하고 가는 엠티에서 신입생들은 신발도 신지 못하고 양말로 복도를 뛰어다녔다.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컨셉의 방을 신입생들이 조를 짜 돌아가며 방문하는 일명 ‘방돌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 방면으로 골탕먹이는 것 같다. PC방은 던져주는 예능 게임을 해야하고, 스타방은 선배들이 틀어주는 음악에 춤을 춰야했다. 찜질방은 땀이 나도록 얼차려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 있는데 바로 ‘소백산맥’이었다. 소주와 백세주, 산사춘, 맥주르 섞은 칵테일의 이름인데 여기에서는 그냥 폭탄주를 대접에 만들어 놓고 차례대로 마시게 하는 의리게임을 시킨다. 음주경험이 많지 않은 스무 살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가 되는 양의 술인 것이다. 이 모든 걸 다 해내는 동안 선배들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조롱하고 웃는다. 나는 정말 하나도 안 웃긴 상황인데 배가 찢어져라 웃는다. 그때 진짜 폭력을 경험했다. 그리곤 친목을 명목으로 다시 술을 마신다. 그 밤의 잔상은 아직도 머리에 생생하다. 우리 조는 소백산맥방을 지나 찜질방을 가는 최악의 루트였다. 아찔하게 취한 채 얼차려를 받으니 나를 비롯한 여자 동기들은 픽픽 쓰러졌다. 쓰러져 늘어진 사람을 나머지 동기들이 어깨에 메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자유롭게 이뤄진 술자리에서는 진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교회와 학교라는 온실 속에서 자란 내가 만난 사막이었다.
그래서 딱 한 학기만에 학교를 휴학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할거면 더 잘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동기들의 열정보다 못한 내 열심은 너무 초라해보여서 견딜 수 없었다. 영화감독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동기, 사운드 감독인 삼촌을 따라다니며 엠비언스를 수집하던 동기. 마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살아온 것 같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그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 하나로 왔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른 휴학의 표면적인 이유는 맥북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이었으나, 내면에는 더 준비하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부하듯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문화생활을 의무적으로 해나가며 예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가랑이가 찢어지기 일보 직전의 뱁새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야맹으로 나는 영화관에 가는 것이 무서웠다. 불이 꺼지면 내가 눈 앞에 손을 왔다갔다 해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내가 영화를 그들보다 더 잘 알거나 더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 편집 과제로 받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2천 컷 남짓으로 이루어져있다. 내 과제는 이것을 컷별로 하나씩 자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화의 재미를 찾기도 전에 영화의 장면 장면을 자르다가 편집실에서 엉엉 울었다.
나는 역시 안될 것 같아.
그렇게 1학기를 다니고 돌연 휴학을 했다. 첫 휴학은 가족들도 몰래한 휴학이었다. 버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차마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디서든 나를 ‘안감독’이라고 소개하며 내 전공을 나보다 자랑스러워 하셨기 때문이다. 딸 셋 중 막내라서 엄마의 이름 앞에는 내 이름 대신 언니 이름이 붙었다. 스무살이 되어서야 엄마 이름 앞에 붙나 싶었는데 어린 나이에 대학생활 부적응은 명백한 ‘실패’였다. 한 학기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기들이 2학년이 되는 3월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최대한 많은 작품에 들어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영화를 배우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균형을 잃었다. 신청한 학점 중에 단 9학점만을 이수하여 학사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2학기 나는 다시 학교를 휴학해야만 했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평신도 선교사로 해외에서 노후를 보내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성인부터는 경제적 독립을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시간이 가까이 와버린 것이다. 내가 21살 때 그렇게 우리 집은 다같이 아빠의 계획에 맞추어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그 다음 해 언니들은 연초와 연말에 나누어 결혼을 했다. 아빠와 엄마가 새로 둥지를 틀 나라는 베트남이었다. 사실 아빠가 베트남에 대한 계획을 품은 것은 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였다. 아빠는 나에게 컨설팅을 맡은 회사가 있는데 거기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나는 울며불며 왜 나만 그런 곳에서 대입을 준비해야 하냐고 반대했다. 아빠는 날 위해 제안을 거절하셨고, 주말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베트남 편을 시청했다. 그 시절 리모콘 소유권을 더 주장했어야 하나 스물 한 살의 나는 절망하며 후회했다. 이제 좀 영화를 찍을만 했다. 실제로 2학기에 각 제작팀의 러브콜이 밀려들어왔다. 현장에서 나도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이어서 참여한 영화들이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내 작품을 찍을 일만 남은 타이밍이었다. 부모님은 이제 언니들도 결혼하면 내가 한국에서 살 집은 없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신 후 적응을 돕기 위해 함께 베트남으로 갔다가 1~2년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권하셨다. 집안의 큰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모두가 바쁜 6개월이 나에게 선택이 시간으로 주어졌다. 반항의 감정과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섞인 채 2학기를 휴학한 4달 동안 3개의 단편영화를 찍었다. 매일 밤을 세워도 촬영장이 재미있고, 눈이 절로 떠지는 것을 보며 영화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더 준비하고 내 작품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편에 천만 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어야 하는 만큼 내게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듬해 둘째 언니를 먼저 시집보내고 부모님과 함께 베트남으로 넘어갔다.
베트남 생활은 정말 고생이었지만 행복했다. 체감 온도가 아닌 실제 온도가 43도의 날씨에 영어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택시조차 탈 수 없었다. 엄마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 챙이 넓은 모자와 물을 챙겨서 그 넓은 하노이 구석구석을 걸어다녔다. 조금 힘들면 쉬었다 가며 또 걷기를 반복해 시장은 어디에 있는지, 백화점과 마트는 어디에 있고, 식당은 어디가 있는지 익혔다. 아빠가 출근하면 빨래를 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메이드 아주머니와 빨래를 하면 나는 베트남어를 공부했다.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외워서 만나는 사람에게 맥락 없이 실습했다. 한류 덕분에 한국 사람의 평균적인 인상은 좋은 편이다. 그러나 베트남 땅에 터전을 잡은 한국인에게는 말이 달랐다. 베트남으로 시집 간 친척의 나쁜 한국 남편을 향한 화풀이를 대신 당하기도 한다. 그냥 웃으며 지나가는 것뿐인데 알지 못하는 언어로 캣콜링을 당하기도 했다. 초반에는 나는 모르는 언어폭력을 옆에 있는 친구들이 알아듣고 싸움이 자주 났다. 세계 어디에서나 약자는 얼굴에 티가 나나 보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고 베트남 한인 사회도, 아빠의 사업도 자리를 잡을 때쯤 베트남 생활에 너무 적응해버려서 학기 중에만 한국을 오가고 휴학을 반복했다. 부모님과 내가 정착하고 둘째 언니네도 조카들을 데리고 함께 이주했다. 그러다 나의 5년 남짓한 베트남 생활의 엔딩은 교통사고였다. 나도 주 교통수단으로 쓰던 오토바이인데 엄마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언니와 나갔다가 음주운전 오토바이에 치인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 치료를 받을 수 없어 간단한 검사와 봉합수술만 한 채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나의 20대는 그야말로 방황과 적응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특히 아침 출근길 버스에 앉아 힘이 들 때 떠올린다. 이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소원으로 빌던 때가 있었다. 내일 무엇을 할지, 다음 달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 내년에는 누구와 있을지가 너무도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면 오늘이 감사해진다. 조금 더 웃는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내 스물 한 살보다 오늘 서른 한 살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