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를 지나가는데, 옛날 생각이 나더라."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둘째 삼촌이 낚시에서 잡은 자라로 끓인 자라탕을 먹으러 둘째 삼촌네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길에 예전에 우리가 살았던 동네를 지났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동네의 모습을 마주하고, 내 생각이 났는지 엄마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는 가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올 때가 있다. 내 쪽에서 먼저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씁쓸함을 입에 걸고는, 대충 몇 마디를 더 건네고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었다.
옛날 옛적 아홉 개의 용이 구슬을 가지고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그 동네는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시절을 보내는 동안 엄마와 내가 살던 곳이다.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모든 트라우마의 원인이 그곳에 있고, 때문에 그 동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의 우울한 청소년기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내 방의 벽지는 1년 365일 곰팡이가 슬어 있어 눅눅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도 꼭 그 모양이었다. 그 동네에서 있었던 일들 중 행복한 순간은 쉽게 증발되었고, 비극적 순간은 단단하게 굳어서 남았다.
나는 그 동네가 죽을 만큼 싫었고, 지금도 싫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요의를 느꼈다.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이 마려웠단 이야기다. 딱히 화장실에 민감해서 학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지 못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늘 집에 오는 길에 오줌이 너무 마려워 달음박질을 해야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동네마다 여기저기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서 있지도 않았고, 있었다고 해도 용돈도 받지 않는 내가 그런 곳에 들어갈 용기가 날 리가 만무했다. 내가 요의에서 탈출할 방법은 오직 집에 얼른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초록색의 대문을 바라보며 요의를 느끼던 그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 집은 아주 낡고 작은 초록색의 철문을 가지고 있었다. 갈색으로 녹이 슬고 찌그러지기도 했던 그 대문을 나는 꽤 창피하게 여겼다. 나는 누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게 싫어서 다른 아이들 집에도 놀러 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으면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렇다고 교우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행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나보다 가난해 보이는 애들이 반마다 꼭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모자란 것에 대한 근본 없는 경멸과 증오는 그쪽을 향했다. 나는 그 대상이 내가 되지 않도록, 무난해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게 억울하다거나 불공평한 것으로 느껴진 적은 별로 없었다. 어릴 때의 나는 내가 가진 풍경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일종의 체념에 가까운 무지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낡은 초록색 대문도, 여름마다 비를 퍼내야 하는 반지하의 집도 아니었다. 요의를 느끼면서도 선뜻 집에 들어서지 못하고 초록 대문을 올려다보던 기억이 남아있는 건, 집에 있는 그 누군가가 무서워서였다. 혹은 그 누군가에 대한 걱정과 연민 때문이었다. 어느 날, 초록색 대문을 둘러싼 분위기가 지나치게 적막에 젖어 있을 때면, 엄마가 외출했겠거니 하는 당연한 생각보다도 '엄마가 죽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사고의 위험성 같은 걸 우려한 게 아니다. 그 시절의 엄마는 언제든 나를 두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기어코'와 같은 부사가 더 어울리는 망상이었다. 다행히도 엄마는 술에 취하거나 어떤 아저씨에게 맞아 코가 부러지더라도 초록 대문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집에 있을 때면 언제나 같은 자세였다. 주방과 경계가 없는 거실에는 작은 TV장 위에 Goldstar TV가 있었다. 엄마는 그 앞에 꽃무늬가 요란한 이불을 여러 겹 깔고, 조금 높은 베개를 벽에 세워 등에 기대고 하염없이 TV를 봤다. 우리 집의 TV는 거의 24시간 틀어져 있었고, 엄마는 밤늦게까지 온갖 TV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나는 중학교 무렵 영화 「What's Eating Gilbert Grape」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엄마가 꼭 우리 엄마 같다고 생각했다. 그 영화를 본 뒤로는 우리 엄마가 사실 그 정도로 몸집이 크지는 않았음에도,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바다표범이나 제멋대로 뭉쳐진 덩어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 시절의 엄마는 가끔 나를 보고, 자주 TV를 봤다. 엄마는 가끔 친절했고, 자주 내 험담을 했다. 엄마는 가끔 동네 아저씨들을 불러 고스톱을 쳤고, 자주 밤마다 외출을 했다. 엄마는 가끔 남의 책을 주워왔고, 자주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엄마는 가끔 웃었고, 자주 죽고 싶다고 했다.
그게 나는 너무 싫었다. 그래서 초록 대문 앞에서는 항상 망설였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데도 아랫도리를 붙잡고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그 동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들이야 거기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 끝도 없지만, 언제나 초록 대문 앞에서의 기억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니 그 동네에 대한 상념이 반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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