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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양 Nov 10. 2020

친절한 귤 이야기

이미지 출처: 123rf


#귤 


  다 똑같아 보이는 감귤도 맛은 다 다르다. 비교적 크고 껍질과 알맹이 사이가 비어 있는 귤은 신맛보다는 단맛이 강하고, 작고 단단한 귤은 신맛이 강하다. 나는 후자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남편은 전자를 선호한다. 지금은 서로 타협하여 작은 귤 한 박스를 다 먹으면 그 다음은 비교적 큰 귤을 사오는 등, 나름대로 번갈아가면서 먹고 있다. 나는 심지어 살짝 초록빛이 도는 정도의 귤을 좋아한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어느덧 거리에 붕어빵 아줌마가 보일 때 쯤이 되면, 자연스럽게도 귤 생각이 난다. 보일러를 뜨듯하게 틀어놓고 이불 속에 들어가 영상이나 보며 낄낄대고 싶어지는 것이다. 평소에 껍질이 있는 과일은 귀찮아서 싫어하는 주제에, 귤을 까는 건 심지어 재밌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귤을 먹는다'라는 행위에는 당연하게도 귤의 껍질을 벗겨내는 통쾌한 순간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오렌지는 싫다. 일단 칼을 들어야 하는 과일은 피하는 편이다. 오렌지는 칼 없이는 내 힘으로 깔 수가 없고, 게다가 귤을 깔 때처럼 부드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저 힘을 주는 과정의 연속으로, 그러니 힘겹기만 하다. 오렌지의 과즙이 귤의 몇 배나 되어 성취감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귤의 간편함이 그 성취감을 이길 정도로 나에겐 소중하다. 

   나는 귤을 까기 전에 양손으로 귤을 주물럭하는 습관이 있다. 아주 어릴 때 TV에서 방영했던 '호기심 천국'(아닐 수도 있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귤을 먹기 전에 주무르면 귤의 당도가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아마 귤을 바닥에 떨어트리기도 했던 것 같다. 같은 귤을 대상으로 반 쪽은 주무르고, 다른 반 쪽은 납둔다거나 해본 적은 없어서 해당 가설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귤을 먹기 전에 귤을 주물럭 거리곤 한다. 그리고는 귤의 줄기가 있었던 단단한 부분 바로 옆을 손톱으로 살짝 눌러 흠집을 낸다. 그곳을 기준으로 힘을 주어 호를 그리며 귤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귤 껍질을 펼쳐놓고 나면 이제 그 껍질은 그 귤을 다 먹기 전까지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귤의 껍질을 까고서는 알맹이 겉에 붙어 있는 귤락(하얀 색의 속껍질)까지도 깨끗하게 벗겨서 먹고는 한다. 나는 아니다. 일단 그걸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은 통쾌한 귤껍질 까기와는 거리가 멀고, 그 이후의 뒷처리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학교 때 알던 어떤 친구는 귤의 투명한 껍질마저 느낌이 싫다고 일일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럼 귤을 먹기까지의 단계가 너무나도 번거로워져서 이 맛있는 걸 먹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게 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과 같이 소심했던 나는 작게 우와, 하고 내뱉었을 뿐이다. 사실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지금도 어디선가 귤 껍질을 벗기면서도 별로 귀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귤을 한 쪽(쪽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마늘과 같은 모양의 그 한 조각을 말하는 것이다.)씩 떼어 먹는다. 언제나 그렇다. 예외없이 그렇다. 귤은 정말 친절하다. 이렇게 한 쪽씩 입에 쏙 들어올 정도의 크기로 쉽게 잘라지니 말이다. 그런데 남편은 귤을 통째로 입에 넣는다. 와구와구. 처음 겨울을 같이 보낼 때에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마치 야만인을 본 듯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해가 안된다는 투로 "귤이 이렇게 하나씩 떼어먹으라고 생겼는데, 왜 그걸 다 같이 먹어?"라고 했지만 남편은 오히려 "이래야 맛있지!"라고 의기양양하게 배를 내밀었다. 이제는 나도 그냥 남편에게 귤을 까줄 일이 있으면 반을 잘라서 입에 넣어주곤 한다.(아무리 그래도 하나 통째로는 좀… 그렇다.) 그리고 나도 남은 반을 한 쪽씩 떼어먹는다. 작으면 작은대로 먹는다. 

   나는 귤의 친숙함이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손님이 오면 대접하는 메론이나, 참외, 수박, 사과, 포도와 같은 과일과 달리 귤은 왠지 대접이라기 보다는, 가족이나 친구와 도란도란 둘러앉아 까먹는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 귤의 그런 생김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귤은 여러 사람과 나눠먹기 좋다. 입이 작은 아기가 있으면 작은 쪽을 주면 되고, 입이 큰 사람이 있으면 굳이 나누지 않고 남편처럼 반 개를 한 번에 입에 넣을 수도 있다. 칼과 같은 위험한 물건 없이도 손쉽게 껍질을 깔 수 있고, 옆에 있는 사람과 원하는 대로 나눠먹을 수 있다. 내가 깐 귤은 내 입으로 다 들어가지 않고, 옆에 있는 엄마에게도 남편에게도 나눠줄 수 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눌 수 있게 하는 귤은 다시 생각해봐도 참으로 친절한 과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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