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기점표지판, 긴급 상황에서 생명을 지키는 아날로그 네비게이터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하나면 길 찾기에 어려움이 없는 시대다. 하지만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기기가 고장 나거나, 터널·산악 지형에서 GPS 신호까지 사라진다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구조 요청조차 못 하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올 수 있다. 이럴 때,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표지판 하나가 생명을 살릴 열쇠가 된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우측 갓길에 녹색 바탕의 숫자 표지판이 주기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점표지판’, 또는 ‘리정표(里程標)’다. 국토교통부의 도로표지규칙에 따라 설치되는 이 표지판은 고속도로 시작점인 ‘기점’으로부터 현재 위치까지의 거리를 표시한다.
이 표지는 두 개의 숫자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윗부분은 km 단위, 아랫부분은 소수점 이하 100m 단위 거리다. 예를 들어 ‘105’와 ‘.8’이 적혀 있다면, 현재 위치는 고속도로 기점에서 105.8km 떨어진 지점이다. 이 표지는 2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 운전자가 언제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기점표지판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은 바로 긴급 상황에서다. 예컨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향으로 이동 중 ‘350.2’라는 표지판을 봤다면, ‘부산 기점에서 350.2km 지점’이라고 신고하면 된다. GPS보다 빠르고, 말로 설명하기도 훨씬 쉬운 정보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도 “사고 시 기점표지판 숫자만 불러줘도 구조 및 출동이 훨씬 신속해진다”고 말한다. 특히 사고나 고장이 잦은 야간이나 비상시, 이 아날로그 표지판은 디지털 기술이 멈췄을 때 가장 믿음직한 ‘로케이터’가 된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GPS 수신이 불가능한 구간에서 길을 잃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특히 터널, 산악 구간, 혹은 통신 음영 지역에선 위치 확인이 어려워 구조 요청 자체가 늦어질 수 있다.
하지만 기점표지판은 전기나 통신에 의존하지 않는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이 ‘아날로그 표지판’은 단순한 거리 표시를 넘어, 생존을 위한 가장 확실한 위치 정보가 된다. 위급 상황에서 이 숫자를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설치된 작은 표지판, 기점표지판은 단지 거리를 표시하는 장치가 아니다. 사고·고장·통신 장애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당신의 위치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말 그대로 ‘생명줄’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녹색 숫자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도로 위 좌표가 될 수 있다. 다음 고속도로 주행부터는 기점표지판을 의식적으로 확인해 보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