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약 하나를 3개월 동안 썼다. 누가 보면 양치를 안 하는 줄 알겠다. 한 달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출장에 나가있다 보니, 기숙사에서 보내는 시간도 한 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가족들하고 함께 쓸 때엔 어떤 생필품이든지 예비로 쟁여두지 않으면 불안할 만큼, '소모품'이라는 말 그대로 소모되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거늘. 이곳에서 홀로 쓰기 위해 쟁여둔 생필품들은 재고의 유무와 관계없이 잔여량에 대해 관심을 크게 갖지 않게 된다.
평소 물건을 쓸 때, 끝까지 싹싹 닦아 깨끗하게 다 쓰려고 한다. 낭비를 싫어하는 편이기도 하고, 모름지기 이 물건들도 다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나에게 왔을 텐데 사용되지 못하고 버려지면 그 편이 너무 아깝게 느껴지니까. 그래서 치약이든 뭐든, 자르고 뒤집어서 끝의 끝까지 사용하고 버렸는데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들곤 했다.
아주 어릴 적, 유치원생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족들과 허름하지만 지금의 다이소와 비슷한 신박한 생필품이 많은 가게를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치약의 꼬리(?)부분을 옆으로 밀어 꽂은 뒤 돌돌 말아 치약을 끝까지 짜내 쓰게끔 하는 신박한 물건이 있었는데, 생소하지만 실용적이었던 그 아이템을 사 와서한동안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덕분에 끝의 끝까지 사용하고 그 역할을 다한 치약을 버릴 때면, 묘한 쾌감과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이왕 태어난(태어났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만들어진' 보다는 '태어난'이라는 말이 나는 더 가치롭게 느껴진다) 물건들을 끝의 끝까지 쓰고 버려야만, 그 물건에 대해 예를 다한 기분이었다.
치약을 끝까지 쓰기 위해 옆을 가위로 자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이것 하나를 다 사용하는 꽤 길었던 시간 동안 내 입은, 내 입이 내뱉는 언어는 그만큼 깨끗했을까. 다 쓰고 내버리는 홀가분함만큼이나, 그동안 얼마 정도의 정제된 말들을 내뱉었으려나. 감사실에 와서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기에. 치약처럼 말 또한 소모품이어서 쉽게 내뱉고 사라지는데, 한참 동안 아껴 쓴 꼴이 되어버린 치약처럼 그동안의 나도 많은 말을 아끼며 지내왔다. 그래서 그렇게 말로 비워내지 못했던 그 무게를 여기 이곳에 토해냈던 걸지도 모르겠다.
출장을 다닐 때마다 가리는 것 없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나를 봤던 부서의 선배들이 그들의 출장길에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항상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낸다. 네가 왔으면 정말 맛있게 잘 먹을 것 같다고. 그러니 다음에 꼭 같이 오자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떠올려주는 그들의 전우애(?)에 감개가 무량하다. 얼마나 맛있는지 굳이 맛보지 않아도 맛있는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느낌. 생각해 준 마음이 고마워 온갖 이모티콘으로 아양을 떤다. 포만감 가득한 헛배부름 덕분에 아꼈던 말들이 아쉽지 않고, 정제된 말을 내뱉었을까 고민하는 일도 잠시 잊게 된다.
감사실에서 근무하며 말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주워 담을 수 없는 그 소모성과 더불어 상대에게 가닿는 무던함과 강렬함 사이에서, 말은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한 언어가 되기도 했다가 다시금 되살릴 수 없는 흉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다들 각자의 언어에 신중했으면 좋겠다. 실체를 알고 묻는 질문에 거짓을 말하는 얼굴들을 보는 일이 조금 버겁다. 말을 내뱉기 전에 다들 양치는 하고 온 걸까.
이제 막 깨끗하게 비워내고 버린 치약을 뒤로하고, 다음 출장을 끝마치 기숙사로 돌아왔을 땐 선반 위에 쟁여두었던 새 치약을 써야겠다. 또 얼마의 시간 동안 그것을 사용하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리게 줄어드는 그 용량만큼이나, 나 또한 많은 말들을 아껴가며 오랜 시간을 또 보내겠지.그러나 의도와 관계 없이 아껴진 시간만큼이나 정제되고 책임질 수 있는 말들만을 내뱉어야겠다 다짐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아끼되 신중할 수 있기를.
그리 지내느라 늦게서야 다 써버린 치약을, 다음에도 마지막까지 싹싹 닦아내 홀가분하게 버릴 수 있기를. 나에겐 그것이 늘 예를 다하는 일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