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nge time

귤색 손톱을 깎으며

by autumn dew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작은 냉장고를 샀다. 그간 유독 추웠던 겨울이었던지라, 집 안에도 추운 것을 두고 싶지 않았던 걸까. 게다가 쟁여두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니 냉장고가 크게 필요치 않았다. 냉장보관용 식품은 그때그때 마트에 가서 사 와 그날 바로 해결하면 되고, 차갑게 오래 보관해야 하는 것은 가뜩이나 추운데 먹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날씨가 좀 풀리고 있고, 가끔 집에 놀러 오는 이들도 있고 하니 괜찮은 간식이라도 내려면 냉장고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이사 올 때쯤 장바구니 담아놓은 오래 묵은 새 냉장고를 이제야 주문했다.


전에 살던 곳은 여럿이 지내는 기숙사였기에, 복도 중앙에 있는 공용냉장고를 써야 했고 그곳엔 내가 먹을 것을 일절 보관하지 않았다. 찝찝하기도 했고, 가지러 가기도 귀찮아서. 바깥 온도가 냉장고에 가까운 겨울 날씨엔 가끔 냉장 보관만 해도 되는 작은 간식은 기숙사의 이중 창문 사이에 넣어놓고 다음 날 찾아먹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살아온 탓에, 혼자 지내는 동안 냉장보관을 해야 하는 음식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사택으로 이사 와, 혼자만의 보금자리가 생기고 가장 먼저 산 가전은 세탁기였다. 먹는 건 나가서 먹더라도 빨래는 미룰 수 없으니까. 그리고 집안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 빨래라. 오래전부터 솔잎향 섬유항균제를 쓰는데, 빨래를 널어놓은 거실에 나설 때나 빨래를 널어놓고 퇴근해서 집 문을 열었을 때 그 향이 코로 들어오는 순간의 기분이 좋다. 세탁기를 샀을 무렵에는 곧이어 냉장고도 바로 사겠거니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몇 주 전, 딸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 하던 부모님이 인천으로 올라오셨고 엄마는 늦은 저녁, 아파트 앞 마트에서 여태 내가 절대 산 적 없었던 과일을 봉투에 담았다. 주황빛깔의 고운 천혜향. 이따 들어가서 아빠랑 다 같이 먹자, 남은 건 냉장고에 안 넣어도 되니까 하나씩 두고 먹어, 하고.


때마침 좋은 과일이 들어왔던 건지, 아니면 엄마가 골라줘서 그런 건지 천혜향은 상상 이상으로 달았다. 역시 엄마가 오니까 과일도 먹는군. 그렇게 달디 단 천혜향을 딱 하나만 남기고 1박 2일 동안 셋이서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렇게 엄마 아빠와의 1박 2일이 종료된 후, 그들을 다시 기차역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다시 홀로 마트에 들러 천혜향을 한 봉지 더 사 왔다. 셋이 아닌 혼자 먹기엔 하루에 하나가 적당했고, 그 이후 퇴근을 한 뒤 집에서 먹든 밖에서 먹든 저녁을 먹은 이후에, 천혜향을 꼭 하나씩 쪼개 먹었다. 평소엔 좀처럼 먹지 않던 과일을 먹으며 조금은 스스로를 챙긴다는 그 느낌이 좋았고, 어디서 보았는데 신 것을 먹고 양치를 바로 하면 안 된다고 하였던 것 같아 다 먹고도 잠시 앉아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보면서 혼자 만의 디저트 시간을 늘려나갔다.


그때부터였다. 매일 과일을 하나씩 먹기 시작한 것이. 사놓은 천혜향을 다 먹어갈 때쯤, 천혜향을 팔던 마트의 가판대에는 오렌지가 나와 있었다. 오렌지는 마침 세일을 맞아 싸게 팔고 있었고, 그렇게 10개가 넘는 오렌지를 한 봉지에 담아 사 왔다. 역시나 오렌지도 매일 저녁을 먹고 하나씩 잘라먹었다. 저녁에 과일을 먹으면 당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지만, 나는 이 시간이 아니면 과일을 먹을 일이 없는 걸. 조금 일찍 먹고, 대신 조금 늦게 잘 테니까 이 시간에 먹어야지 별 수 있나요.



아무튼 앞으로 나는 이렇듯 나를 위한 자투리 간식 시간을 'orange time'으로 지칭하기로 했다. 냉장고를 사기로 마음먹은 것 중에 하나도 이제 이 orange time을 다채롭게 만들고 싶어서. 꼭 주황색의 과일이 아니어도, 가공되지 않은 건강한 것들을 보관해 두고 먹고 싶다. 생각해 보니 기숙사에 지내는 동안 겨울 창문 틈에 넣어뒀던 것들이야말로 우유처럼 몸에 더 좋았던 것들인데, 어쩌면 더 귀한 것들을 그런 험한 곳에 방치해 두었다 생각하니 조금 슬프다.


쟁여두기를 싫어하는 내가 산 냉장고이니, 달라지는 것은 없다. 쟁여두려고 산 것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봉지 속의 열어보고 싶지 않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나를 위해 챙긴 귀한 것들만 보관할 참이다. 짧지만 소중한 orange time에 내놓을 만한 것들로.




이번 주말, 무조건 냉장보관해야 하는 딸기를 당당하고 호기롭게 샀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하나씩 먹어야지. 기숙사에서 보냈던 시간과 춥다는 이유로 미루고 미루며 냉장고 없이 살았던 시간이 지금에 이르러 서글프게 느껴지기보다는, 그 시간 덕분에 귀한 것들을 알게 되어 그때의 내가 안타깝지만은 않다. 역시나 불편은 교훈이 있다. 당연은 그 귀함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불편이 불쾌한 것은 아님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이제 제철 과일을 때마다 챙겨 먹으며, orange time의 색을 다채롭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그 시작은 주황색이었으니, 이 시간은 'orange time'이라는 고유명사 그대로 둬야지. 그새 조금 자란 손톱이 노랑에 가까운 주황으로 물들었다. (아주 어릴 적, 36색 크레파스를 썼을 때 이런 빛깔의 색을 '귤색'이라고 불렀던 것 같으니 내 손톱의 색은 귤색이라 하겠다.)


또각또각, 귤색으로 물든 손톱을 깎으며 주말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