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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는데 시간이 낭비되었을까

편의로부터의 해방

by autumn dew

얼마 전, 본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날. 엄마와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러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그제야 양말을 신느라 잠시 놓아둔 핸드폰을 챙겨 나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다행히 실물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를 갖고 있었고, 손목엔 시계도 차고 있었다. 별일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처음에는 살짝 불안한 마음이 없지 하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굳이 불편한 점을 하나 꼽자면, 만약 누군가 그 사이 나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고 이후 내가 핸드폰을 갖고 나가지 않아서 몰랐다고 말했을 때 요즘 세상에 누가 핸드폰을 안 갖고 다니냐며, 그 말을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 정도. 그것 외엔 불편함은 없었다.


덕분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갈 때가 돼서야 버스정류장에 가기 전 버스도착 정보를 미리 파악할 수 없고, 택시를 미리 부를 수 없다는 점 정도만이 아쉬울 뻔했으나 다행히 택시 정류장에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으니 이 또한 불편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는 하교 이후, 놀이터나 친구집에 놀러 가는 일이 잦았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쇠맛 나는 놀이터. 실컷 놀다 집에 돌아갈 때쯤엔 항상 신발 안의 모래를 비워야 했고, 놀이기구는 만지고 나면 손에는 쇠냄새가 가득했다. 놀이터가 아니면 친구 집이었는데, 친구 집에 가서는 가자마자 전과에 있는 답을 후다닥 베껴 숙제를 끝내고 열심히 놀기만 했다. 인터넷도 되지 않는 컴퓨터였지만 그림판을 켜서 누가 더 그림을 잘 그리나 겨루기를 하는 등, 매일 같은 방식으로 노는 것이 지루해 우리는 자주 놀이를 만들어 놀았다. 그리고 그중 지금도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네모, 세모, 별표 등 각종 도형을 그린 종이카드를 두 세트로 만들어 하나씩 나눠가진 뒤 한 사람은 거실, 한 사람은 방에 들어가 서로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하나 둘 셋 하면 같은 카드를 내미는지 확인하는 놀이. 그렇게 열심히 서로에게 보낸 텔레파시가 통한 것이 확인된 순간, 각자의 자리에서 자지러지게 웃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에 그토록 우정을 강요하는 놀이가 또 있었나 싶기도.


며칠 전, 퇴근길에 집 근처 중학교 앞에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 때문에 집에 가지 않고 모여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같이 손에는 각자의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고 모두 자기의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든 무리 지어 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전방주시를 해야 하는 이동 시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핸드폰을 보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친구와 함께일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것은 같을 테다. 핸드폰은 시간을 가져가다 못해 앗아가는 느낌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예전보다는 사진이나 영상처럼 장면을 기록하는 수단은 더 정교해지고 선명해졌으나, 외려 이 또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되어 진짜 의미 있는 추억은 제쳐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것이, 예측할 수 없음이 당연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어느 순간 불편으로 점철되어 편의라는 목적을 갖고 생겨난 것들로 인해 그 시간이 단축되었으나, 과연 그로 인해 아껴 벌어들인 시간들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시간만을 가져다주었을까. 어쩌면 진짜 유의미한 시간들은 지금은 낡아 보이는 불편으로 여겨지는 그 시간들에 숨어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얼마 전, 가족들과 떠난 일본여행에서 가이드로부터 일본의 문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일본의 선거문화였는데, 일본은 선거 때 연필로 본인이 지지하는 사람의 이름을 투표지에 적는다고 했다. 한자다 보니, 잘못 쓰면 지우개로 지워야 할 수도 있어 연필로 쓴다고. 그래서 후보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쓰기 쉽게 하기 위해 히라가나로 구성된 이름으로 자주 개명을 한다고 했다. (요즘엔 이 방식으로 인해 부정투표니 뭐니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논외다.)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나는 언제 한 번 내가 뽑은 사람의 이름을 손으로 적어본 적이 있었나. 내가 뽑지도 않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 정도나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노트에 적어본 정도. 내 이름이 아닌, 누군가의 이름을 손으로 적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니, 불편한 방식이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다.


의미는 불편해야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여태 불편에 관한 글을 종종 썼고, 이제 불편과 마주할 때 불편이 주는 번거로움보다도 그 이면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텔레파시를 보내며 우정을 강요하던 어린 날의 기억으로 비추어 봤을 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것들이 주던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평소에 가죽으로 된 시계줄의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착용한다. 시계의 숫자는 로마자들로 쓰여있다. 면 스마트워치는 시간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데다 어떨 땐 착용한 이의 세세한 신체 정보까지 보여주기도 하며, 나아가 재빨리 그를 찾는 누군가와 연결시켜 주려 열심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스마트워치를 살 생각은 없다. 내 몸과 하나뿐인 휴대폰도 충전하기 힘든데 시계까지 충전해 가며 쓰고 싶지도, 그리고 사실 내 몸과도 다른 누군가와도 그렇게 빨리 연결되고 싶지 않다. 아련한 틈, 그 틈을 가급적 유지하고 싶다.


그래, 틈.

그 불편으로 보이는 소요시간을 나는 틈이라 말하고 싶다. 그림을 읽듯, 시간을 읽느라 비단 1초의 시간을 소모했다 해도 과연 그 시간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마저 낭비되었다 하면, 어쩔 수 없다. 편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포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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