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아서 잘한 일

한 해의 끝에 선 당신에게

by autumn dew

12월의 첫날은 출장지에서 맞았다. 5일간의 출장이었지만, 차를 갖고 가지 않은 탓에 출장지에서는 줄곧 선배와 택시를 타고 다녔다. 아침엔 숙소에서 목적지까지, 또 퇴근 후에는 다시 숙소까지. 희한하게도 출근길은 무난했는데, 퇴근 때에는 항상 길이 밀렸다. 가끔 어떤 기사님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길을 거스르고 자신이 아는 길로 조금 돌아가도 되는지를 물으셨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여행 온 것 마냥 택시투어라 여기며, 기사님께 조금이라도 덜 밀릴 거라 짐작하시는 길이 있다면 편하게 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덕분에 예정된 루트에 없던 호수공원의 야경도 구경한 날도 있었고, 여러 기사님과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일도 꽤나 흥미로웠다.


출장기간 중 한파가 몰아쳤던 때가 있었는데 그날 아침, 출근길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지역방송의 DJ가 날이 쌀쌀한 것이 진짜 겨울이 온 것 같다며, 겨울의 어원을 소개해주었다. 겨울은 '겨다', '겻다'라는 말에서 유래해 '있다', '머무르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고로 날이 추우니 집에서 머물러야 하는 계절이라고. 몰랐던 사실에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날이 추워 머물러야 하는 계절임에도 나는 12월의 첫날부터 어딘가로 떠나와 있구나, 그 생각을 했다.




한 해를 어떻게 보냈던가.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올해의 끝에서, 또 이렇게 눈 뜨고 코베이듯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올 한 해 잘한 일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리 생각해도 열심히 산 것 말고는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을 가질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는 근무지가 변경되고 업무가 바뀌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일을 해내느라 많은 에너지를 쏟고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애쓰며 살았는데. 한 해만에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하기엔, 올해가 그리 무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새롭고 참신하다 여길만한 업적이 없어서 그런가, 잠시나마 괜한 착잡함이 밀려왔다. 올해 뭐 했니, 나.


이내 올해에 해낸 일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려다 포기하고, 마음을 돌려 반대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주변에서 요하는 일들과 내가 원하는 일들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기 바빴던 한 해. 그렇다면 이 와중에도 용케 하지 않은 일들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하지 않음으로써 잘한 것들을 찾아보는 걸로. 새로운 것을 해내는 일도 대단하지만, 관성적인 것들을 하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렇기에 가장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일은 올해엔 정말 많이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로 올해엔 감정 소모를 자주, 그리고 오래 하지 않았다. 회복탄력성이 좋아져서인지 예전만큼 관계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갑작스레 밀려온 마음의 파도가 오래가지 않았다. 가끔씩은 자괴감이나 우울함에 잠시나마 침잠한 적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늘 파도는 빨리 잠잠해졌다. 애먼 일에 오래 마음을 쏟지도, 눈물을 보태지도 않았다. 조금은 매정하게 느껴지려나.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드라마나 영화를 보곤 종종 눈물을 훔치곤 했으니 감정이 아주 바싹 메마르진 않았다고 조금이나마 근본적인 인간미를 어필해 본다.


다음으로는 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떠날 때에도 짐을 많이 꾸리지 않았다는 것. 물욕이랄 게 없을 정도로 필요한 것들만 샀다. 무언가를 사고 싶어질 때면 그와 비슷한 것들 중 오래 사용하지 않았던 것 중 하나는 버렸다. 버릴 것을 정하고 나서야, 살 것을 염두에 두었다. 최소한으로, 가장 필요한 것만. 그러다 보니 잦은 출장에 짐도 최소화하게 되었다. 없어도, 부족해도 어떻게든 살아졌다. 그럼에도 나의 서랍에는 유용하다 소문난 것들이 간혹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다른 이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감사하여라. 스스로는 유용한 것들 앞에 눈을 감았다 생각하였으나, 아끼는 이들이 빈 곳간을 채워줬다. 역시, 없어도, 부족해도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리고 또 의도치 않게 채워진다. 어떨 땐 이전보다 더 좋은 것들로.


마지막은 지난 인연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것. 슬프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일부러 애써 마음을 거두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들의 마음에서 나 또한 거두어졌을지도. 생일이나 명절 같은 때에 의무감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들을 놓기로 했다. 얼굴 한 번 볼 시간을 서로에게 내어주지 못하는데, 그리움과 아쉬움이 섞이지 않은 안부인사가 무슨 소용이 있나. 의무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날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나는 알면서도 그들을 모른 척했다. 한 때, 한 시절 충분히 빛났더라면 그걸로 되었다. 모든 관계가 현재진행형일 필요는 없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엔 말을 할 때 단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만큼 내가 그 단어를 애용해주지 않았으니 그런 거 아닐까. 단어가 곧바로 생각이 나지 않으면 요즘엔 단어의 뜻을 풀어 설명하지, 굳이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애써서 떠올리려다간 머리가 더 아프니까. 그런 것처럼 관계도 자연스레 잊히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붙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에 잊고 있던 단어가 떠오르는 것처럼, 어쩌면 끝나버린 관계도 어느 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지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아무튼 지금은 애를 쓰고 싶지 않다.



잘한 것은 없지만, 하지 않았기에 잘 된 일들이 꽤나 있었다. 한 해의 참신한 실적과 우수사례가 떠오르지 않는 나는, 한 해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숙한 한 해를 보냈는지 되돌아보며 하지 않았으므로 잘한 일들을 더 찾아보려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업적은 떠오르지 않으니.




아, 그러고 보니 하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있다. 나를 이 세상에서 1g도 사라지지 않게 한 것. 이건 정말 숫자에 기반한 다른 어떤 것보다 명백한 사실이다. 나잇살인가, 이것만큼은 도무지 잃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쥐어짜 내다보니 떠올랐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억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