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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y 14. 2023

감기가 떠난 자리

2017, Autumn, Okinawa, Japan

6년 전 가을, 동생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이 이직을 준비고 있었고 나는 업무의 성수기 중 한가운데에 있었다. 각자의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우리 둘은 가깝지만 먼 곳으로 잠시 도망치기로 했다. 그렇게 떠났던 곳이, 일본의 '오키나와'였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동생은 면접을 보고 합격발표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나는 업상 극성수기였지만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던 틈을 타 휴가를 냈다. 다녀오고 나서 피곤해 녹초가 되더라도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한국을 떠났다. 여행 계획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3일 중 하루는 당일치기로 진행하는 패키지여행을 신청하고 도착 당일과 마지막 날 일정만 대충 짜둔 상태였다.



그렇게 따뜻한 남쪽나라에 도착하고 나서, 어이없게도 둘 다 감기를 달고 다녔다. 출발하기 전 공항에서부터 몸이 살짝 으슬하긴 했는데, 공항 약국에서 사 온 상비약만으로는 두 사람이 복용하기엔 그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도착하자마자 현지 약국에 들러 감기약을 샀다.

그러나, 역시나. '감기는 약 먹으면 7일, 약 안 먹으면 일주일'이라는 말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약을 먹어도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이틀째 패키지여행에선 둘 다 버스 안에서 비몽사몽이었다. 약에 취해 바깥구경은커녕 가이내리라고 할 때까지 쪽잠이라도 자보려 했는데 그마저도 편히 기대지도 못한 채, 콧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 혹시나 사무실에서 일 문제로 연락이 올까 봐 핸드폰도 꼭 쥐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을 비워내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천근만근 더 무거워진 몸과 함께 도무지 가벼워지지 않는 마음도 버스에 함께 실려있었 듯.


그러면서도 배탈처럼 꼼짝할 수 없는 괴로운 속병아닌 게 어디냐고, 서로를 독려하며 틈틈이 약을 챙겨 먹었다. 휴식을 위해 들른 카페에서도 계속 따뜻한 음료를 사 마시며 몸을 진정시켰다. 도망치듯 떠는데 본분을 잊지 말라는 었는지, 한국에서 같이 따라와 버감기에게 제발 우리를 떠나 줄 수 없냐고 설득하.


그렇게 여정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도착한 뒤 어이없고 신기하게도 우리의 감기는 싸-악 나았다.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이제 놔주겠다는 의미였을까.


그 해 가을, 오키나와 여행 중 동생은 면접 본 곳으로부터 합격 연락을 받아 지금까지 그 직장을 잘 다니고 있고, 나도 여행에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현업에 복귀해 당시의 성수기 업무를 무사히 끝마쳤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해 가을 여행은 우리의 험난한 겨울을 새롭게 나게 할 힘을 주는 가을잠 같았다고나 할까.



이번 주 4일 간, 1년에 한 번 있는 교직원 집체교육을 다녀왔다. 그동안 한창 바빴던 업무가 마침표를 찍어가는 중이었는 데다가, 특히나 이번 교육엔 친분이 있는 선후배들이 많이 참석하는지라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출발 하루 전부터 몸이 이상했다. 지난주 오래 내렸던 비로 기온이 내려갔던 탓에, 자고 일어나서 살짝 몸이 으슬했는데 이러다 괜찮겠지 하고 무시했거늘. 요즘 한창 유행 중이라는 감기가 하필 나에게도 온 모양이었다.


운전을 하며 연수원까지 가는 중에 감기약 때문이었는지 정신이 살짝 몽롱하기도 했다. 역시나 교육을 받는 4일 내내 골골댔다. 챙겨간 약들도 4일간 복용하기엔 그 양이 부족했다. 어차피 약 먹어도 7일, 안 먹으면 일주일이니 텀블러에 계속 따뜻한 물을 들고 다니며 남몰래 몸을 챙겼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대체가능한 다른 진통제들로 버텼다.


교육기간 중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나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남모를 고충을 뒷담화처럼 조금씩 첨언해서 그랬던 건지 벌주는 것마냥 대구에서 달고 온 감기가 교육 일정 내내 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어이없게도 이렇게 집으로 돌아오니 몸은 거의 다 나아가고 있다. 어이없어, 정말.



교육기간 동안 후배들은 많은 사람들 속 선한 분위기에서 온 힘을 다해 나를 리드해 줬고, 선배들은 몸도 마음도 골골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앞으로  챙겨줄게!" 하며 애교 섞인 응원을 보내주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 분계셨다. 몸은 힘들었을지언정 그들의 뭉클한 응원을 얻어온 소중한 시간이 또 앞으로 얼마간의 나를 살게 할 것이다.

그 해 오키나와 여행이 가을잠이었다면, 이번 교육은 봄잠(?) 정도로 보면 되려나.






, 그러니 이제 춘면(春眠)에서 깨어나 힘을 내 살아내 보자. 뜨거운 여름맞이해야 한다. 본분을 잊지 않고 다시 돌아왔잖니.



어느 여정이든 예상치 못한 감기로 골골댄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나는 어디론가 다시 또 떠날 것이다. 어차피 감기라는 녀석은 제자리를 잊지 않고 돌아온 나를 떠나 줄 것이고, 그때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무언가 하나는 내게 남겨줄 것이다.


무사히 돌아오면, 또 살아낼 힘이 어떤 모양으로든 만들어져 있다는.


다시 그렇게 살아낸다는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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